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의 논란 속에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미국의 인종주의 수위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지닌 사람이라면 토착 원주민들에 대한 억압의 역사와 노예제도 및 짐 크로법에 관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아직도 백인우월주의의 틀을 벗어던지지 못했고, 암세포처럼 번지는 백색주의로 인해 타인종집단들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혹시 인종주의란 우리가 이미 딛고 일어선 과거사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게 아닐까?
이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종주의로 직접 영향을 받은 피해자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은 소수집단의 기회를 가로막는 현실적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 따져보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있는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가?
렌즈의 초점을 흑인들의 경험에 맞추면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기회를 차단하는 장벽이 여전히 높다는 사실을 또렷이 보게 된다. 흑백간의 임금격차는 1968년이나 2016년이나 거의 똑같다. 같은 기간, 두 집단의 가구당 자산규모 차이는 오히려 벌어졌다. 흑인 성인이 3대째 빈곤을 대물림할 가능성은 백인 성인들에 비해 무려 16배가 높다.
두 집단사이의 이같은 격차를 영구화하는데 인종주의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지난 2004년 연구원들은 뉴욕시의 회사에 지원한 흑인과 백인 구직자들에게 비슷한 옷차림과 유사한 대답을 준비케 한 후 면접시험을 보게 했다. 이들의 자격조건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대등했다. 그 결과, 흑인 지원자들이 받은 입사제안은 백인 지원자들에 비해 절반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면 노예제와 인종격리 및 인종주의의 영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빈민지역 거주자들에 대한 금융서비스를 제한하는 이른바 레드라이닝(redlining)과 같은 조직적 차별구조는 흑인들이 부를 쌓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데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했다. 인종주의는 우리가 조용히 지나온 과거가 아니라 만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백인우월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부끄러운 국가이고, 아메리칸 드림은 백인들만의 특권인가? 자, 여기서 다른 이민집단의 데이터를 살펴보자. 이들에게로 눈길을 돌리면 인종주의 장벽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블룸버그통신의 노아 스미스는 “최근 몇 년 간, 히스패닉계의 소득이 미국 내 다른 주요 인종집단들의 평균 소득에 비해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고 지적했다. 빈곤 속에서 성장한 히스패닉의 45%가 중산층 혹은 그 위의 소득계층으로 진입했다. 백인에 버금가는 계층간이동성 비율이다.
2000년 히스패닉의 30% 이상이 고등학교를 중퇴했지만 2016년에는 10%로 떨어진다. 1999년, 18~24세의 히스패닉 가운데 3분의 1이 대학에 진학한데 비해 지금의 대학진학률은 50%에 달한다. 이들의 대학입학률은 이미 2012년에 백인을 추월했다.
프린스턴, 스탠포드, UC데이비스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이민가정 자녀들은 출신국에 상관없이 100년 전의 이민자 자녀들과 거의 동일한 속도로 중산층에 진입한다. 하지만 이 같은 경제적 성공은 이민그룹들이 더 이상 역경과 편견, 착취에 직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단지 교육과 계층이동이 이런 편견의 영향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경제적 진전은 그렇다 치고, 문화적 통합은 어떨까? 예를 들어보자. 브라운대학 연구보고서는 영어를 배우는 멕시코 이민자들의 비율이 급등하고 있으며. 비 멕시코계 미국인들로부터 고립되는 비율 역시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늘어나는 인종간 결혼은 이 같은 통합의 산물이다. 2017년 퓨리서치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갓 결혼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29%, 히스패닉 신혼자들의 27%가 다른 인종그룹에 속한 배우자를 맞아들였다. 흑백결합 역시 1980년 이후 대략 세배가 늘어났다. 복수의 인종적 정체성을 지닌 미국인들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애틀랜틱지에 실린 에세이를 공동작성한 리처드 알바, 모리스 레비와 도웰 마이어스는 연방센서스국의 2060년 인구조사에서 스스로를 비백인(nonwhite)으로 분류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52%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인종그룹들에 관한 데이터를 살펴보면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드러난다.
첫째, 많은 사람들이 ‘유색인종’(people of color)이라는 분류를 마뜩치 않아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유색인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의 절대다수를 아우른다. 하지만 서로 다른 경험과 다른 종류의 편견에 직면한 이들을 단일 항목 안에 몰아넣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E. 태미 킴이 뉴요커지를 통해 지적했듯 미국의 모든 비백인 인구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것은 흑인들이 집중적으로 당한 차별을 유색인종 전체의 어마어마한 머릿수로 나누어 축소하고 희석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둘째, 이제 폭스뉴스 진행자인 터커 칼슨을 비롯한 극우인사들이 입이 닳도록 떠들어댄 ‘대체이론’(replacement theory)을 폐기해야한다. 대체이론이란 해외에서 이주한 외국인들이 조만간 백인을 제치고 미국사회의 주류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대체이론에 겁을 집어먹은 백인들은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모아주었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인종그룹들 사이의 이 같은 혼합은 미국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미국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제로섬 게임을 벌리는 라이벌 인종진영으로 확연히 갈라진다는 주장은 정확치 않다. 고유의 문화와 인종적 정체성의 일부를 간직한 채 다른 그룹의 구성원들과 융합하는 집단은 성장한다.
날실과 씨실로 단단히 엮인 미국의 인종적 현실은 백인 대 비백인이라는 단순이분법의 적용을 거부한다. 미국의 현실은 한편으로 뿌리깊은 구조적 인종주의가 자리잡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두에게 활짝 열린 기회의 땅이라는 모순을 동시에 포용한다.
지난주 필자가 본 젊은 흑인여성의 T-셔츠에는 “나는 선조들이 애타게 꿈꾸던 희망”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필자는 그 문구를 저항과 자부심, 굳센 결의와 희망의 메시지로 읽는다. 이처럼 혼재된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다면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로 가득 찬 미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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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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