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얻으려는 공부): 관찰 대상에 중점 관찰자의 마음 상태 무관
▶ 불교(버리려는 공부): 관찰 대상은 물론 관찰자의 마음 정화 중시
과학자들은 대상에 관심이 많고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하지만 관찰자인 본인의 마음을 정화하려는 노력이 일반적으로 병행되지는 않는다. 수행자들은 대상뿐 아니라 외부대상을 통찰하는 마음을 정화하고 있는가 하는 관찰자의 마음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마음에 탐욕과 성냄이 없도록 정화한다. 즉 스스로가 청정한가를 놓치면 수행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요새는 과학이 대세가 되면서 뇌가 곧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즉 뇌가 죽으면 사람도 끝이라는 단멸론 사고가 많아지고 있다. 아직은 정신적 영역에 대해 연구결과가 미천한 수준이다. 의식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못하고 있다. 마음을 일으키면 뇌에 어떤 영향을 일으키는가와 같은 반대방향의 연구가 일어나지 못하는 수준이다. 뇌라는 것이 물질적 토대이므로 마음에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불교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마음의 무한한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능력을 갖고 있어서, 수행이 깊은 이들은 눈을 통해 보지 않아도 먼 다른 세계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다른 이의 마음을 보고, 과거 전생을 본다. 마음이 갖고 있는 능력이다. 당장 누가 증명할 것이냐는 시스템이 있지는 않지만 마음을 개발하여 이것이 가능한 현실로 일어나있는 사람끼리는 통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물질이 사라진다고 해서 마음이 없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몸은 시체가 되어 스러지지만 일생의 마음수준과 행위의 흔적 따라 마음이 작동을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조건의, 그 연기의 한 부분이다. 현재 죽을 때 일어났던 이 마음이 일어남 상태가 다음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분명히 연기적인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잘 설명하지 않고 무시하고 현재 일어나는 것은 조건 따라 일어나는 것은 맞는데 태어나는 것은 우연히 태어나고 죽으면 끝이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한다.
하여 과학과 불교가 달라지는 부분 중 하나가 마음에 대한 이해이다. 과학은 증명을 해야 하니까 뇌라던가 물질적인 것을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 것은 인정을 잘 하지 않는다. 학자라면 인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행하는 것은 마음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물질을 의지하고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이 맞지만, 일생동안 일으켰던 의식수준에 맞는 몸에 또 인연이 되어서 마음이 계속 작동한다. 그것을 윤회라고 한다. 학자들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연기는 인정을 하나, 최초에 일어나는 것의 조건을 설명 못한다. 즉 불교의 시각은 갈애와 집착, 즉 뭔가 하려고 하는 동력이 있으면 마음은 지금은 내 몸을 의지해서 일어나지만 이 몸이 인연이 다해서 죽게 되면 이 마음이 멈춰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몸을 조건으로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회를 이야기하는 흐름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하고 관계있는가 하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해석되기 힘든 것이 특히 선정 같은 부분이다. 우리는 논리적인 생각을 사유라고 분별해서 모든 세상을 판단하는데 이 분별이 일시적으로 멈춰진 자리가 있다. 이것이 선정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분별로써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경험할 수 밖에는 없다. 그래서 마음이 개발되면 개발될수록 상상하지 못한 마음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마음을 그렇게까지 개발해 본 경험이 없으므로 인정 못하고 자기가 보지 못한 영역을 부정한다. 하지만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깊이 수행한 사람, 마음을 닦는 수행자들은 부정하지 않는다.
전생의 영향을 받아 광대한 현생이 영향을 받고 또한 미래생을 받는다는 것(조건)을 이해하는 사람은 사는 스케일이 다르다. 광범위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생각하니까, ‘니가 뭐 스님으로 살다가 깨닫지 못하면 이 생이 다 날아가는 것 아니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마음이 한 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의 삶이 미래에 영향을 주는 것을 알면 이 생에 비록 깨닫지 못하더라도 죽을 때 다른 것은 못 가져가도 마음으로 지어놓은 업은 영향을 끼치고 가져간다는 것이다. 이 개발해놓은 지혜를 바탕으로 수행한다. 이것을 알기에 불자로서 인과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갈애가 남아있지 않는 한 끝까지 윤회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죽으면 끝이라면 이 생에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 자살일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이 보시기에, 마음의 업이 남아 있다면 아무리 도망가고 피해도 괴로움은 기어이 또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어서 더 이상 태어날 수 있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수행의 동기부여가 된다. 이것을 부정하면 이 삶이 허무해진다. 아등바등 살다 끝나버린다.
그러므로 불교는 세계관이 거대하다. 부처님 법을 듣기 위해 목숨 버리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지금 버리는 것은 한 생이지만, 괴로움을 벗어날 토대가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의 4가지 단계는 윤회와 관계가 있으며, 괴로움에서 끝나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토대가 된다. 그것을 이해해야 이 생에 부족하나마 열심히 한걸음이라도 더 가는 것이 다음에 그만큼 더 쉬우므로 수행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학은 쌓는 공부다. 해도 해도 지식을 쌓음은 끝이 없고 종착점이 없다. 반면 불교는 버리는 공부이다. 지혜를 개발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림으로써 괴로움을 소멸한다. 수행은, 버리기 위해서 배운다. 탐진치를 끝내고 아라한이 된 존재를 무학이라고 한다. 배움이 끝났다. 내가 자신을 위해서 할 공부는 끝났다. 이제는 남을 위해 할 뿐이다. 이 세상이 무상하고 괴로움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깊이 통찰하면 현상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버려지므로 이것으로 괴로움을 벗어나게 되니 끝이 있는 공부다. 큰 차이점이다. 즉 불교공부는 프레임이 중요하다. 사성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 바른 견해다. 바른 견해가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최상위 프레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기준점으로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것은 이 마음이란, 어리석음과 갈애가 남아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상속된다는 것을 이해하면 마음에 있는 갈애와 어리석음을 버리는 것이 수행이니 이를 위해 마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한다. 수행하는 목적이 마음의 탐진치를 버림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인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수행과의 갭이 있다. 때로 과학관점에서 법문에서 윤회얘기를 하지 말라고 간곡히 얘기하기도 하는 충정은 이해하지만 자기가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불교는 논리를 합리적으로 공부하고 무시하지 않지만 논리를 초월해 있다. 수행을 해보면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정말 확연하게 진리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현재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버려야 한다는 것은 오만하다고 볼 수 있다. 아직은 과학이 개척하지 못한 세계가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출처: 제따와나선원 유튜브 영상, 요약 정리: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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