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따와나선원(Jetavana-vihāra)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약 25년간 머물며 수행하고 설법했던 도량이다. 한국 등 한자권에서는 기수급고독원, 줄여서 기원정사로 번역된다. 2018년에 춘천에 제따와나선원(www.jetavana.net)이 생겼다. 굳이 산스크리트어 명찰을 붙인 것이 좀 특이한데 선원의 생김새는 가위 파격이다. 기와지붕이니 대들보니 전통한옥사찰 티는 눈 씻고 봐도 없다. 언뜻 고대 소아시아문명권의 ‘재건된 유적지’ 같은 느낌을 주는 벽돌건물이다. 후대의 선지식들에 의해 해석되고 가공된 가르침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처음 가르침’을 ‘처음 제자처럼 본받고자’ 하는 선원장의 뜻이 반영된 것이라 한다.
선원장은 일묵 스님, 1990년대 후반 서울대 수학과 박사과정 중 출가해 ‘화제 내지 논란’이 됐던 그 주인공이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의 상좌 원택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그는 이후 범어사 강원을 마치고 봉암사 등 여러 선원에서 수행한 뒤 미얀마의 파욱국제명상센터, 프랑스의 플럼빌리지, 영국의 아마라와띠 등지에서 수행했다. ‘언하에 단박에 깨달음’의 상징 같은 성철 스님의 손자급 제자면서도 객관적 통찰 논리적 규명 반복적 검증에 방점이 찍힌 초기불교적 내지 과학적 접근법을 취한 탓에 그는 출가 뒤에 덤으로 ‘화제 내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일묵 스님이 작년 가을 10월7일 제따와나선원 수요정기법회에서 행한 불교와 과학에 관한 법문을 세 차례에 걸쳐 간추려 싣는다.
요즘은 과학으로 검증되면 좀 더 신뢰가 가고 그런데, 불교와 과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어떤 게 있는가 살펴볼까 한다. 그러면 불교를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공통점부터 보면, 저도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비슷한 측면이 많다. 과학에서 어떤 현상을, 특히 물질 현상을 바라볼 때 개인생각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한번 보고 감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 아이디어가 생기면 그 실상을 알기 위해 반복해서 실험하고 연구하는 과정이다. 논리적 흐름에 따라 검증하면서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술발전이나 문명발전에는 이런 과학적 논리적 수학적 사고방식이 뒷받침돼 있다. 어떤 현상이 있으면 계속 관찰하면서 그 원인을 찾아보고 또 그에 대한 언어적 개념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면서 뉴턴이 왜 사과는 아래로만 떨어질까, 여기서 착안해 중력을 찾아내고, 다시 여기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찾아낸 것과 같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어떤 주장은 대개 논문이나 저서 형태로 나오는데 그러면 그게 맞는지 안맞는지 다른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검증하는 과정이 있다.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과학과 불교의 가장 흡사한 면이다. 자기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이론이 되면 다른 사람도 알게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드러내는 과정이 있다. 그 다음에는 오류를 검증하는 과정이다.
불교수행에서도 똑같다. 직관적으로 알아지는 것, 딱 보면 저건 뭐라고 느껴지는 게 있지만 그걸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계속 관찰하면 뭐랄까 오류가 훨씬 적어진다. 자기의 몸과 마음도 거듭 거듭 관찰하면 처음에는 탐욕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것도 미세한 형태의 탐욕이었다, 내가 자만을 내세우고 있는지 몰랐는데 계속 관찰하니 아 이것도 또 다른 형태의 자만이었구나, 또 우울하고 따분하고 이런 게 화인 줄 몰랐는데 계속 관찰하니 이것도 화구나, 이렇게 그 현상에 그 본질에 보다 정확하게 접근하게 된다.
그냥 관찰만 하면 정리가 잘 안된다. 과학에서 선배들 이론을 바탕으로 새 연구를 하고 이론을 만들듯이, 우리도 선배들이 해놓은 것에 의지하게 되는데, 부처님께서 천신만고 끝에 깨달아서 정리해놓은 내용들이 있다. 부처님께서 현상에 대한 통찰을 다른 사람도 알 수 있게 해준 것을 법이라 한다. 그 법이라는 툴을 가지고 현상을 이해하면 훨씬 더 깊이있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런 통찰력이 누적되면 똑같은 탐욕 성냄 무상 무아 이런 개념을 이야기해도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지혜가 완전히 체득되면, 번뇌가 일어날 일이 없을 것이다.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은 결국 학습의 과정이다. 깨달음은 신비롭게 한번 탁 경험하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로또 맞듯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과 정진의 결과다. 부처님께서 바른 정진을 강조하신 이유다. 깨달음이 일어날 때는 엄청난 도약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런 조건이 성숙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과정을 무시하면 불교가 완전 신비적이 되고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는데도 뭔가 탁 하면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기본은 과학이나 불교수행이 크게 다르지 않다. 최고이론은 뭐냐, 그건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이다. 물리학에서는 그런 걸 통일장이론이라고 한다. 힘이라는 게 중력도 있고, 전자기력도 있고, 원자핵 사이에 핵력이라고 하는 강한 힘도 있고, 이게 분해될 때 나타나는 약한 힘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이런 거를 하나의 이론으로 통일하는 이론인데 아직 아무도 성공을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하려다 못하고 죽었을 만큼 어려운 거다.
그걸 부처님은 하셨다. 그게 뭐냐. 연기라는 가르침이다. 이건 모든 현상에 다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어떤 조건에 의해 일어난다, 이건 예외가 없다. 존재도 그렇고 아무리 작은 물질, 즉 양자의 범위에서도 그렇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일어나는 데는 조건이 있고 조건이 없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이게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다, 이건 모든 현상에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다.
저는 학문을 해본 사람으로서 물질세계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세계에도 다 적용되는 그런 진리를 발견했다는 건 정말로 엄청난 통찰력이다고 본다. 특히 물질세계보다 마음의 세계는 훨씬 복잡한데 그것도 유익한 법 해로운 법 이렇게 정리하셨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의 핵심을 탐진치 이렇게 세 가지로 명확하게 제시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런 법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잘 모를 수 있는데, 정말 엄청난 일이다. <출처: 제따와나선원 유튜브영상, 요약정리-정태수 기자, 8일자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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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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