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
이제는 진부한 표현을 넘어서 청춘들 사이에서 농담으로 사용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방송 SNL에서는 개그맨 유병재는 이 표현을 비꼬아 “아프면 환자지!”라고 답하며 욕을 퍼붓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장 도움 안 되었던 말 중에 하나기도 하다. 청춘의 수고스러움을 위로하기엔 비교적 평탄해 보이는 삶을 살아온 작가의 배경이 만들어낸 편견일까? 청춘 미화 스푼, 그 시절을 견딘 자신을 향한 자기애로 똘똘 뭉친 설탕 듬뿍 넣은 라떼 시절을 회상하던 장년이 건네는 가벼운 위로로밖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비슷한 표현으로 엄마는 나에게 위로를 건넨 적 있다. 너 나이 때는 다 아픈 거라고. 지금은 제아무리 잘나 보이는 친구라고 할지라도 다 그 길이 평탄치 않고 저마다 아픔이 있다고. 틀린 말 하나 없지만,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위로에 나는 여전히 뚱하게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엄마는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보이던 지인 이야기를 꺼내 그분의 아픔을 들쑤시며 구체적인 예를 들어 나의 환심을 사려 했고 나는 엄마를 향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저 살아보니 어느 누구 할 것이 아픈 시절을 다 겪더라 하는 정도의 심심찮은 위로로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에 나는 몹시 흥분했다.
“남이 힘들고 아픈 게 도대체 나랑 뭔 상관이야?” 다들 힘들다는 이야기가 내게 위로가 된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소리를 빽 지르고 자리를 떠났지만 계속해서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나를 오래 괴롭혔다. 남을 깎아내리며 위안으로 삼는 것, 동정을 핑계 삼아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오랜 시간 경멸해왔고 나는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여러 번 다짐해왔다. 하지만 이런 뻣뻣한 노력과 벌렁거리는 심장은 내 안의 못난 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럴까?” 하면서 나 자신은 철저히 분리해 손가락질했던 모습이 스스로 보일 때, 나는 주로 소리를 빽 지르고 혼자 씩씩거려왔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친구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해 주지 못한 적이 다반사였고 바닥을 만난 친구를 보며 내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낸 것처럼 한결 가벼워지는 경험 역시 많다. 사실 내가 그렇게 화가 났던 이유는 엄마의 남을 깎아내리는 위로가 나에게 너무 잘 먹혔기 때문일 거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남의 아픔은 기분 나쁘게 잘 먹히는 진통제 같다.
진통제가 제 역할을 다하고 아픔이 외로움과 함께 사무칠 때,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라는 시를 처음 접했다. 그는 덤덤한 말투로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라 말한다. 결국은 청춘이고 노년이고 할 것 없이 사람이기에 외롭다는 말이 지금까지 들어왔던 다들 그렇다는 위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로 위로를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편함은 없었다. 시인이 위로를 건네는 수선화, 즉 나 자신이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 등장할 것만 같은 못된 팥쥐가 될 필요도, 친구의 아픔을 이용하는 치졸한 인간일 필요도 없어서일까?
이 시를 읽는 내 머릿속에는 여러 인물의 수선화가 등장했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말라”는 정호승 시인의 충고는 간절했던 바라왔던 면접 결과에 끝까지 울리지 않았던 전화기를 붙들고 끙끙대던 과거의 나를 불러일으켰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라고 하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울며 기도하던 예수도 등장했다. 외로움 때문에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은 자유를 향해 내 곁을 떠나가던 옛 애인을 소환했다.
간절하기에 상처받고 사랑하기에 두렵고 성장하고 있기에 아파하고 있는 여러 등장인물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무게를 홀로 버티고 있는 강인함과 이를 지탱하는 외로움 모두 나를 짓눌렀다.
연약하지만 강인한 수선화가 여럿 피어있는 수선화밭을 상상했더니 그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게 않겠다 싶다. 그곳은 아파하면서도 밝게 빛을 내는 에너지가 있을 것 같고 이따금 나는 질투의 냄새도 싱긋한 향기가 감싸줄 것 같다. 눈을 감고 수선화 밭을 그리는 것이 내게 주는 최고의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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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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