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A 거주 정종욱 전 주중대사 ‘저우언라이 평전’ 펴내
▶ 오무(五無)의 삶… 깨끗한 삶과 투철한 공인의식 귀감
이름은 들어봤지만 많은 사람들이 저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중국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정치지도자로 손꼽히지만 한인들에게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毛澤東)의 측근 정도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 중국대사 등을 역임한 정종욱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저우언라이 평전’(민음사, 362쪽·사진)을 발간했다. 저자는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저우의 삶을 연대별로 정리했다. 저우의 일대기는 중국 공산당의 역사와도 궤를 같이 하는 만큼 그 평가 역시 공산당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복잡하다. 왜 저우언라이인지, 평전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저우의 업적과 평가,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등을 간추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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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우언라이 평전을 쓰게 된 계기는?
“막연하지만 저우에 대한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70년대 초반에 있었던 미중 데탕트였다”고 밝힌 저자는 “그 때 저는 미국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서방측의 보도는 미국 측 움직임 특히 키신저에 관해 집중되어 있었지만 중국 측에서는 누가 이 역사적 사건을 주도했는지, 왜 했는지 등은 비교적 관심 밖이었다”며 “마오가 큰 그림을 그리면 저우가 중국정부의 전략과 구체적 정책을 책임졌다는 게 알려진 배경이지만 실제는 저우의 역할이 매우 컸다”며 그 때부터 저우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 왜 저우언라이인가?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현대 중국의 내실을 다진 혁명가, 행정가, 외교가 등 저우를 설명하는 말은 많다. 저자는 “중국 현대사의 주인공은 단연 마오쩌둥이다. 그러나 시야를 넓혀 보면 그 옆에는 언제나 저우언라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저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각인된 인상은 국가에 대한 무한한 공인정신과 인민을 위한 철저한 헌신과 희생이었다. 저자는 “공산혁명에 대한 마오의 광기로부터 중국을 구해 냄으로써 오늘날 중국의 근대화가 가능하게 했던 사람이 바로 저우였다”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당과 국가를 파탄 직전에서 살려낸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 중국인들은 왜 저우를 존경하는가?
저우의 신조는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였다. 그의 깨끗한 삶과 투철한 공인(公人)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서문에서 “저우는 오무(五無)의 삶을 살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사는 동안 후손이 없었고, 높은 관직에 있었으나 사사로움이 없었고, 당원으로서 지나침이 없었고, 많은 일을 했으나 원한을 사지 않았고, 죽어서 시신조차 남기지 않았다.
“저우의 아내(덩잉차오)는 아기가 태어나면 자신들의 혁명 활동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 유산시켰다.(p.81) 이들은 부부로서의 삶에 앞서 혁명 동지로서 일생을 같이하기로 약속했고 이를 죽을 때까지 지켰다.(p.83)”
▲ 저우와 마오를 비교할 때 중국인들의 평가는?
마오와 저우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는 매우 대조적이다. 저자는 “마오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지만 마오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마오는 혁명가이지 국가 건설의 지도자는 아니었다. ”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저우는 부수는 일보다 만드는 일에 뛰어났다”며 “마오가 투박하고 억센 야성이었다면 저우는 합리적 지성이자 실용적인 이성이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평생을 두고 협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저우의 노력으로 국가 기능이 정상화되면 다시 마오가 새로운 파괴를 시작해서 저우에게는 항상 힘겨운 시기가 계속됐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마오는 이런 이유로 저우를 조화주의자 또는 투항주의자라고 비난했으나 저우는 결코 마오에 대한 원망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우를 위선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게 저우의 장점이자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 미중 데탕트에서 저우의 역할은?
미중 데탕트 과정에서 저우의 역할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컸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중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괴수 미국과 화해한다는 것은 20세기 최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저자는 “마오에게 미국은 일시적인 협력의 대상이었지 영원한 협력 동반자는 아니었다”며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 혁명의 꿈을 방해하는 미국이나 소련은 모두 마오의 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우는 미중 데탕트가 마오가 집요하게 추구하던 세계 혁명의 꿈을 내려놓는 선택이 될 것으로 믿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현재 진행중인 미중 간의 패권경쟁의 함의를 읽을 수 있다는 저자는 “저우가 말한 부강한 중국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 미국을 능가하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초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때문에 정 교수는 “오늘날 시진핑의 꿈은 저우가 아니라 마오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 저우의 철학과 스타일은
인간 저우는 중국의 전통, 유교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혁명은 이러한 전통을 부정한다. 저우에게는 이것이 내적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20대 후반에 혁명 투사가 된 저우는 상하이 사변이나 난창 봉기, 대장정 같은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남과 원수를 지거나 가슴에 한을 남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도 극단적인 투쟁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택했다. 권위와 갈등을 겪을 때에도 정면으로 도전하기 보다는 우회하거나 절충했다. 돌아가거나 절충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일단 패배를 인정하고 차선을 택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저자는 “저우의 무의식 세계 속에 내재되어 있던 중국의 전통적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 저우의 외교철학과 북한과의 관계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저우가 정권을 잡고 1인자가 됐다면 지금의 중국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저우는 제 1인자의 지위를 추구하지 않았다. 저우는 너무나 합리적이었고 지성적이었고 권력의 함정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저우는 평화공존의 철학을 중국 외교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그가 주창한 평화공존은 패권주의를 배척한다. 저자는 “이는 냉전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의 기본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북한 함흥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저우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이는 김일성이 지시해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한국전 때 중국이 참전하는데 있어 저우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북중 관계도 나중에는 틀어지게 됐다.
1975년 4월에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이 남침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저우가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계기로 북중관계가 제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됐다”며 “미중 데탕트의 영향도 있었지만 저우의 평화공존 특히 미국과의 평화공존 정책 때문에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반대했다”고 설명한다.
▶ 저자 정종욱 교수는 누구
정종욱 교수(80·사진)는 서울대학교에서 중국정치를 연구한 1세대 중국 연구자로 현재는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 교수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 박사, 하와이 대학 정치학 석사, 그리고 예일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메리칸 대학 조교수, 하버드 대학 김구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부터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일하다가 1996년 중국 대사로 임명되어 98년까지 근무했다.
한중 수교 이후 초창기 대중 외교를 직접 담당한 외교관으로서 이른바 현장 경험을 두루 갖춘 ‘중국통’으로 손꼽힌다. 귀국 후에는 아주대, 서울대 국제대학원 등에서 강의했으며 박근혜 정부에서는 2014년 통일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버지니아에 거주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중국론’,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공저), ‘정종욱 외교 비록’ 등이 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누구
1974년 11월 26일, 저우 중국 총리가 자신의 병실로 찾아온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
저우는 1898년 중국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났다.
톈진 난카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대입시험에서 떨어져 1년 8개월 만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유학 시절의 경험이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1919년 난카이 대학 재학 중 반제국주의를 기치로 하는 5.4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22년 중국 공산당 파리지부를 창설했으며 1924년 귀국해 황푸 군관학교 정치부 부주임이 됐다. 1927년 장제스가 일으킨 상하이 쿠데타에 대항해 민중 봉기를 조직하고 난창 봉기, 광저우 코뮌을 주동했다.
1934년 대장정에 참여했으며 시안 사건 때는 공산당 대표로 국공합작을 이루어냈다.
공산정권이 수립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국무원총리를 지냈으며 1958년까지 외교부장 그리고 1954년 마오로부터 중국공산당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주석 직을 넘겨받아 1976년 1월 8일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
유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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