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과제로 썼던 에세이들은 대체로 어떤 경제, 정치 현상을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돌리는 식으로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짜낸 자료조사 내용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을 논하자니 그것은 철학이나 문학의 영역일 것이고, 대단한 해결방안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박사님들의 일자리를 뺏는 무례한 행동일 것이다. 한 시간 내에 제출해야 할 과제에 마지막 문단을 앞둔 심정은 대체로 이렇다. 아니, 위대한 어른들이 (그렇다, 유리할 때만 ‘어른’이란 집단에서 스스로 배제하는 것은 대학생들만의 특권이다) 수십 년 풀지 못한 문제에 대해 내가 해결방안을 제시한다는 게 말이나 돼? ‘사회'라는 집단이 빗어낸 비극, 아니 사회적 균형을 위한 희생이라고 마무리 짓고 얼른 자야겠어.
그리고 이런 사고 과정과 함께 배출된 수없이 많은 에세이들이 시사하는 바는 사실상 대학교육의 목적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좀 더 바람직한 태도로 과제를 접할 수는 있었겠지만...)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들이 다양한 집단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석적으로 생각해보는 것만 해도 대학생으로의 일정 의무를 다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실질적인 개선 방향들을 논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전문지식을 쌓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겠지. 청년들은 대학기관에서의 졸업과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선택해 사회구성원으로서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것을 권유받는다. 패기와 열정을 가지고!
청년의 패기로 사회에 뛰어든 뒤 얼마 안 되어 사회의 뻣뻣함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도 다반수다. 아무리 ‘미생' 같은 드라마를 보며 회의적으로 자라온 청년들이라고 한들 현실의 차가움 앞에 완전히 무감각할 수는 없을 것. 세상을 흔들어보라고, 꿈을 크게 가지라는 교육을 기억하며 열심히 일하지만, 현실의 장애물은 종류도 무수하다. 자신이 쌓아온 것을 지켜내려는 기성세대와 대립할 때 오는 장애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정치싸움일 수도 있겠다. 너무도 다른 개인이 대립하는 입장을 내세우며 살아 온 사회가 변한다는 것, 그 변화의 크기와 양상과는 무관하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정신적인 해법을 강구하게 된다. 밖으로 빠르게 뻗어 나가는 직선과는 대비되게 안으로 향하는 둥근 모양의 노력일 것이다. 종교와 명상 등의 힘을 빌려 자신을 돌아보며 살 구멍을 찾는다.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하지 않는 뻣뻣한 사회에 언제까지고 소처럼 뿔만 들이박을 수 없기에. 좀 더 나은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개인의 삶에서 담아내는 변화의 의미를 스스로 새긴다.
인도 사상과 힌두교의 토대가 된 경전 <우파니샤드>에서는 심지어 전체적인 의미를 띄는 ‘자연’이 개인으로의 ‘자아’와 동일하다고 소개한다. 사회에서의 크고 작은 문제, 어쩌면 더 커다란 개념까지도 자아가 담아낼 수 있다고 해석해도 무관하겠다. 그렇다면 수없이 들었던 “세상에서 보기를 바라는 변화, 스스로 그 변화가 되어야 한다"라는 상투적인 말도 야망을 권유하기 위해 억지스럽게 쓰인 말이 아닌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소심한 도피와 반항? 정도로 도달한 정신적 승리가 앞서 소개한 범아일여 사상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누군가에게는 진정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되겠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노력은 스스로에게 있고 이것은 단순히 내 한 몸 살아보겠다는 발버둥보다 훨씬 대단하다. 하지만 이같이 정신적 깨달음과 내적인 수련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실제 사회로 나가 현실에 부딪힐 이유가 없어진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의 저자, 채사장은 젋은이들이 내면의 깨달음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등지는 이런 현상을 모든 종교의 공통적 고민이라 시사한다. 즉, 우리는 세상에서 온전하게 벗어나 완전히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만큼, 종교와 사상이 어느 정도 사회화되어 세속적으로도 변화를 이끌어줄 젊은이들을 배출해내야 한다.
청년의 고민은 무궁무진하지만 패기와 현실의 괴리도 단언 그중 비중 있는 부분을 차지한다. 지금의 사회가 품고 있는 수많은 부당함을 인지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소중하게 품어왔던 패기와 현실과 마주할 때,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애물을 넘으려는 노력과 정신적인 해소가 불편하게 공존한다. 멋없이 말하면 타협, 의미 있게 포장하면 균형. 일기장 넘기듯 지금의 고민을 돌아보는 장년이 되었을 때 나는 그 균형에 가까워져 있을지, 혹 자신을 비웃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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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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