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줄기 빛으로 다가와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느 날 우리는 영원 속에 남겨지고 그들은 또 어딘가로 흘러간다.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간다.
남겨진 우리는 인연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잠시 찬란했던 빛의 추억들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영원의 끈 그 어느 부분을 붙잡고 놓을 줄도 모르고 떠날 줄도 모르는 어설픈 존재가 되어 ‘인생’이라는 정거장의 플렛폼에 서 있다. 어쩌면 이 인생은 주역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소품을 한쪽에 놓고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한 손에는 ‘영원’의 끈을 잡고.
옛날 명동에 ‘시공관(명동 예술회관)’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그 시대의 국립소극장 같은 역할을 했던 작은 일제시대 건물이다. 오다가다 지나가며 연극 포스터를 가끔 보게 됐었다. 어느 날 본 포스터의 제목이 특이하게 다가 왔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제목과 함께 젊은 두 남자배우의 모습이 클로즈업 돼 있었다. ‘전무송 이호재’ 라는 이름과 함께 꽤 심각해 보이는 그 두 얼굴이 어느 곳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들 옆에는 나무 하나가 덩그러니 그려져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도’가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높은 섬? 외로운 섬?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수중에 가진 것 없는 빈한한 학생이었다. 그렇게 포스터 한 장으로 끝난 인연이었으나 마음에는 남아 있었나 보다. 이제 나는 ‘사뮈엘 베케트’의 사진이 있는 그의 책을 보고 있다.
‘고도(Godot)’는 상징의 인물이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다. 주인공 두 사람은 그를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메꾸며 보낸다. 영원히 오지 않을 고도에 대한 기대로 내일을 또 기다린다. 삶을 포기할 끈마저 없는 그들은 기대하지 못할 내일을 기약하며 어딘가로 가기로 한다. 그러나 둘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이 희곡에서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소품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고도가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삶의 희망인 ‘고도’는 그들이 택한 ‘상징’이다.
우리는 상징 속에서 자라고 큰다. 알게 모르게 많은 상징의 대상들을 지나치고 선택하며 이 인생을 영위하게 된다. 누구에게는 에로틱한 욕정의 대상이 상징이 될 수 있고, 또 누구에게는 성스런 성자의 흔적이 상징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선택된 상징은 반대로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가치의 품계가 매겨지고 그 가치가 우리의 행동과 진로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치를 둔 상징이 나를 이끌어가는 아이로니 속에서 삶의 기차는 달리고 있다.
우리 인생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는 다른 하나는 ‘인연’이다.
인연 없는 인생이 있을까? 부모의 연이 매개가 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고 시공(時空)이 주는 매개로 인하여 태양과 푸른 하늘과 나무를 보게 된다. 이 세상에 무엇 하나 인연없이 스쳐가는 것은 없다.
나의 고교시절, 누이 집에 들렸다가 우연히 어느 월간지를 보게 된 적이 있었다. 둘러보는 중에 작은 사진 하나가 나의 눈을 끌었다. 당시 20대의 젊은 시인 ‘강은교’의 사진이었다. 멍 한듯한, 그러면서도 범상치 않은 눈빛과 허공을 보는듯한 그 각도가 나의 마음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문학’외에는 별로 할게 없을 것 같은 그녀의 인상이 ‘문학은 또한 타고 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스치게도 했었다. 아무튼 그때 나는 그 분을 언젠가는 한번 만나게 되리라는 인연의 원(願)을 넣은 것을 기억한다.
이 기억으로 나는 먼 훗날 미국 산호세에서 컴퓨터에 ‘강은교’라는 세 글자를 치게 된다. 시 치유 모임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발견한 것은 감격이었다.
‘나정월’이 누구입니까?
나는 그렇게 투박하게 질문을 던졌다.
‘정월은 개화초기 여류화가 나혜석의 호입니다.’
다음날 열어 본 그분의 답글에서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정월’이 나혜석의 호 라는 것과 인연의 원은 이렇게도 풀릴 수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네가 뛰어오는 소리 들려/
호르르를 호르르르 네가 뛰어오는 소리 들려’
강은교의 시, ‘나정월’의 일부이다.
이 시를 통해 그분은 화가 나혜석의 정열과 혼을 빙의 했나 보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나의 원을 풀었다.
‘그날 새벽은 참 눈부시기도 하였습니다/ 모래밭은 나를 오래 헤매이게 하였습니다만/운명은 자주색 망토를 벗어던지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만/ 내 일기장들은 다 해졌습니다만/유리창 밖에서 별이 닳는 소리가 들렸습니다만/
새벽이 다가왔습니다/애인이 힘차게 유리창을 두드렸습니다’
그분의 시 ‘그날 새벽은’의 전문(全文)이다. ‘과거의 추억인가요? 미래의 기대인가요?’라고 다음 날 말을 넣었다. ‘그 둘 다 이겠지요, 그것이 아직 제가 시를 붙잡고 있는 이유가 되겠지요’라는 답글은 내 ‘인연법’을 만족시키고 지나갔다.
이렇게, 우리가 선택한 상징들과 더해진 인연의 업은 인생의 쌍두마차가 되어 각자의 운명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그 다양한 조합은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만들겠지만, 어느 날 이 모두를 아우르는 ‘물’이 되어 만난다면 아름다운 ‘영원’의 하모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올 때는 인적 그친/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中)
<
부영무 (치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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