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발 66주년을 맞아 2016년 6월 25일 DC 소재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에서 카투사 전사자 호명식이 개최되고 있다.
나는 한국전 및 베트남전 참전용사로서 1965년 5월부터 1967년 11월까지 미 8군 지원사(65의무여단) 카투사 지역대장(연락장교)으로 근무한 바 있다. 그런 연유로 2009년 워싱턴지역 카투사 전우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필자는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전투력 증강(병력 충원)을 위한 한국군의 미군부대 배속이란 세계에서 유례없는 카투사 제도의 기원과 한국전 참전 그리고 현재까지 ‘같이 갑시다(We Go Together)’ 슬로건으로 변함없는 카투사의 발족과 실상을 한국전 참전 70주년을 맞아 단편적이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 무초 대사의 제안으로 탄생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기습침공으로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7월 14일 미 제 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부대의 패퇴에 이어 미 제 24사단, 제 1기갑사단이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 못한 긴박한 상황이었다.
8월1일 당시 무초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군 6만5천명 규모의 병력을 미군부대에 배속하는 방안을 발의하여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인들이 전쟁에서 보다 큰 역할을 담당하고 미군의 우수한 무기와 군사력 및 공산 적군의 피아 식별 능력의 조화 등의 중요성을 고려해 무초 대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및 워커 8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역사적인 첫 미군의 ‘KATUSA: Korean Augmentation to United States Army’ 제도가 탄생했다. 이는 무초 미국대사와 이승만 대통령 및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등 3인에 의한 것이다.
이어서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으로 미군 각 부대에 100명의 한국군을 충원하는 ‘Buddy System: 전우 짝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으로 하나는 미군병력손실을 보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제도와 훈련기술 습득으로 한국군 기간요원(장교, 준사관) 양성의 목적을 둔 것이다.
# 강제징집 후 일본서 훈련
1950년 8월 들어 북한 공산군의 강력한 낙동강 진지공세로 서부 쪽 마산, 진주, 통영 지역과 동부 쪽 영천, 경주, 포항지역 전선에 최후 부산 교두보 공략작전의 전황에 따라 미국 본토로부터의 11,175명 충원에 19,165명의 막대한 병력손실로 절대 수의 보충이 부족한데다가 9월 중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에 한국군의 미군부대 보충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8월 15일 전후 주로 대구, 부산지역 가두 강제징집으로 8월 16일 최초로 카투사 요원 313명이 일본 수송선 편으로 부산을 출항,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해 기차 편으로 후지산 기슭에 이미 천막 병사로 준비된 미 제7사단 신병 훈련장에서 10-15일간의 신병 기초훈련의 제식, 소총 조작 및 사격술을 수련한 이들은 K- 군번을 부여받았다.
이어서 매일 약 200명이 부산으로 부터 8월 24일까지 39일간 총 8,625명이 배출되어 단계적으로 한국에서 전투중인 각 미군부대에 보충되었다. 이에 앞서 미 제1기갑사단, 제2, 제24 및 제25사단에는 부산 구포리의 한국군 제 3훈련소에서 배출된 카투사 신병보충이 되여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를 기준하여 총 18,944명(약 2만명)의 카투사가 미군부대에 보충되었다.
# 지평리 전투 등 공헌
본래 카투사는 미군부대 배속 부대원이 주축이지만 전쟁 중 카투사제도의 성공적인 효율성이 인정됨에 따라 다른 참전 유엔군부대에 확대가 되어 영국 연방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5개국을 비롯해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및 벨기에 부대 등 유엔군 부대들에도 배속되었다. 영 연방부대에서는 카투사를 ‘KATCOM: Korean Augmentation Troop to Common Wealth Div.’라고 호칭했다.
또 한편 재일동포학생(학도병) 지원병 642명이 제 1, 2, 3진으로 미 제3, 제 7사단에 배속되고 제 4진은 한국군 9사단(백마)에 배속으로 참전한 것이 카투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초기 카투사는 주로 전투부대, 보병 소대급 병사로 언어장애를 비롯해 문화, 생활습성의 차이로 어려움이 많았으나 엄정한 군기와 전우애 및 작전승리의 투철한 신념으로 소총수를 비롯한 탄약, 보급, 통신, 의무, 포대경비, 진지 축성, 검무소위병 등 다양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으며 낙동강 방어, 압록강 진격 등 수많은 작전에 희생적인 전공을 세웠다.
특히 한국전사에 빛나는 카투사 참전의 대표적인 지평리 및 장진호전투를 회고해보면 중공군 공세에 의한 1.4후퇴에 서울, 원주방어선의 요충지인 지평리 최후사수를 위한 미24단 23연대 불란서 대대 2중대(카투사)의 51년 2월3일-16일의 전투와 미 제1해병사단, 미 7사단 소속의 카투사 800여명이 영하 40도의 혹한에 50년 11월 26일-12월 12일 장진호 방어 전투 참전으로 한 미군 10여만명과 피난민 10만명의 흥남철수 작전이다.
# 1만1천여명 사상, 실종
카투사는 한국전쟁 기간 중 11,365명이 사상 및 실종으로 추산되고 이중 낙동강 전투 전사자 36구가 부산 유엔군묘지, 645구가 동작동 묘지에 안장되고 3,619구의 위패가 헌치되어 있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때 기준 카투사는 23,000여명이었으며 급속한 미군철수의 일시적인 병력부족을 보충할 수 있었다.
현재도 약 5,000명의 카투사가 미군과 함께 전투훈련을 비롯해 공병, 포병, 기갑, 통신, 어학, 정비, 전산, 의무, 헌병, 행정 등 15개 병과와 40종 이상의 군 전문 특기(mos)에 따른 능력으로 일부는 미군 능력의 우수 평가를 받기도 하다.
이처럼 전투능력 향상과 전우애로 굳건한 한미동맹 증진에 공헌하는 군사외교의 귀중한 자산임을 높은 평가와 칭송을 필자도 회합이나 리셉션을 통해 한국에서 보병대 대장과 국무장관을 역임한 콜린 파월을 비롯한 역대 연합사령관 존 틸럴리, 샤프, 빈센트 브룩스 장군과 8군사령관 출신 버나드 샴포, 존 존슨 장군들이 한결 같이 카투사는 우수한 모범군인이라는 칭송을 여러 차례 확인한 바 있다.
# 양키 방위병 인식 안타까워
한편 유감스럽게도 최근 정부 고위직 아들의 카투사 병영 특혜문제와 일부 국민의 카투사는 한국군에 비해 미군부대에서 편한 군인으로 귀공자 또는 양키 방위병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기도 하지만 카투사 제도 발족과 한국전 참전 70주년을 통해 조국방위, 나라사랑, 전투력 증강 그리고 한미유대 증진에 몸 바친 카투사의 영령을 추모하고 명예 선양 그리고 ‘같이 갑시다’ 슬로건으로 분투하는 현역 카투사들에게 사기와 자긍심을 높이는 격려의 성원이 필요하다.
끝으로 한국전 미군 36, 492명 전사자와 함께 카투사 8,000여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지는 ‘Wall of Remembrance: 추모의 벽’ 건립으로 영원히 카투사의 숭고한 역사가 후세에 전승될 소망이 한국, 미국 국민의 염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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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희 / 워싱턴카투사전우회 초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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