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외교관은 귀족만 할 수 있는 3대 직업 중 하나였다. 당시 귀족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은 고위 장교, 고위 공무원 그리고 외교관이 여기에 속했다. 수려한 언변과 품격, 상류층의 에티켓과 예의범절이 몸에 밴 자만이 할 수 있었던 직업이었던 셈이다. 어느 고위 공무원보다 높은 품위와 단정하고 깔끔한 처신이 요구되는 자리인지라 외교관은 말과 행동에 신중해야 하며, 상황에 따라 유연한 처신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한국 외교통상부는 외교관 지망자들을 위해 펴낸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인, 외교관’이란 책자에서 외교관이 갖춰야 하는 기본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외교관의 기본! 당신은 준비되었습니까’라고 운을 뗀 이 책자는 외교관의 기본으로 사명감, 폭넓은 지식과 정확한 판단, 신뢰와 함께 가장 중요한 기본 중 하나로 신중한 말과 글, 태도를 강조했다. 특히 외교부는 여기서 ‘외교관은 말 한 마디, 문장 하나, 행동 하나에도 신중해야 합니다. 알고 있는 것을 정확하고 쉽게 표현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고 적절하게 처신함으로써 외교관은 상대방을 설득하고 국익을 최대화할 수 있다’며 강조한다.
최근 세계 여러 주재국에서 한국 외교관들이 보여주고 있는 낯뜨거운 망발과 처신은 외교관의 품격이나 품위를 거론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주재국 시민권을 가진 동성 직원을 성추행해 대통령이 뉴질랜드 총리로부터 면전에서 해당 외교관의 송환을 요구받는 받는 처참한 사태가 있었고, 시애 틀총영사관에서는 부총영사 직급 외교관의 ‘인육’ 운운하는 망발이 알려져 온 국민이 경악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엄격한 자기절제가 요구되는 국정원 파견 LA 부총영사가 직원을 성추행해 본국으로 소환된 사건이 뒤늦게 알려져 파장이 일기도 했다. 혹자는 일부 극소수 외교관의 이례적인 일탈로 치부하지만 그러기에는 외교관들의 비리, 추행, 갑질, 망언, 추문 등이 끊이지 않고 있어 이제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는 이들도 있다.
얼마전 필자가 LA 총영사관 부총영사의 처신과 언행 문제를 지적한 ‘부총영사가 동포사회 갈등 중심에’(본보 10월12일자)란 제하의 기사에 대해 총영사관이 입장을 밝혀왔다. 해당 부총영사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입장문의 문장 하나하나를 보면서 한국 외교부가 외교관 지망생들에게 “말 한마디, 문장 하나 행동 하나에도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외교관의 기본‘을 떠올렸다.
인종차별 시위 당시 한인 피해를 축소보고 했다는 지적에 부총영사는 “피해신고는 총영사관으로 공식 접수된 신고건수를 토대로 작성해 축소한 것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이미 비대위에 접수된 51건의 피해 사례들이 미디어에 공표된 지 한참 뒤에 LA 총영사관이 정부에 보고한 피해 건수는 이보다 40건이 적은 10건에 불과했다. 부총영사가 밝힌 이유는 “총영사관에 공식접수된 신고가 10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눈 앞에 피해업소가 보이는데도 공식접수가 안됐으니 보고할 수 없다는 식이다. 재외동포 보호 임무를 지닌 외교관의 사명감은 보이지 않고, 관료주의적 나태와 무사안일함이 엿보이는 해명이다.
‘LA 한인회 행정책임자를 불러 고함을 질렀다’는 지적에는 “한인회측 인사와 ‘면담’해 기금지원 관련서류 제출을 요청했을 뿐”이라는 입장을 밝히면서 정작 ‘고함 지적’에는 해명이 없었다. 2주 동안 사무실 방문을 종용하는 전화에 시달리다 못해 부총영사를 총영사관 사무실로 가 만난 이 한인회 인사가 들었던 ‘버럭 고함’은 누가 지른 것이었을까. 예산 지원을 무기로 한인단체 인사를 부하직원 다루듯 고압적인 자세로 대하는 태도, 이것을 ‘갑질’이라고 한다.
‘남가주 한국학원 이사에게 한국 입국금지를 위협했다’는 지적에는 “현행법상 국익을 해치는 행위를 하는 인사는 총영사관이 입국금지조치 건의를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는 해명이 나왔다. 헛웃음이 나오는 해명이다. 이견을 가진 한인단체 인사에게 ‘입국금지조치 건의’ 조항이 있다고 느닷없이 들이민 ‘소개’는 그 인사에게는 ’위협‘이 된다. 이 입장문을 ‘받아쓰기’한 한인 언론도 있지만 이같은 허술한 문장이 주재도시 정부기관이나 주류언론 상대가 아니라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익을 위해, 재외국민 보호를 위해 외교 전쟁터 최일선에서 말과 글로 싸워야 하는 외교관은 처신에 신중해야 한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가지며 품위와 품격을 지켜야하는 것이 외교관의 기본이자 숙명이다. 외교관 입문 15-20년차에 통상 맡게 되는 참사관(councilor)은 공사(minister)에는 못미치지만 대체로 서열상 부공관장, 총영사관의 경우 부총영사를 맡는 것이 한국 외교부의 통례이다. 외교부에 입부한 지 25년째 되는 부공관장님, “‘외교관의 기본’, 이제 준비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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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목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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