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무더웠던 여름. 단아한 치자꽃이 습한 공기 속에서도 향기를 품어 내던 날, 기억은 단편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한 기억으로 찍혀있다. 거리를 바쁘게 오가던 사람들, 지하도와 연결된 곳을 나올 때 습한 공기가 얼굴을 덮치던 도심 속 열기, 돌담길에 놓여있던 어느 장인의 현판들. 삶에서 어떠한 날이나 순간들은 특별함을 예상하지 않았고, 또한 특별하지 않았음에도 시간이 지나며 특별함으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일상을 반복하던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기억이 오늘 이순간 소환되어 나온다. 이름도 붙여져 있지 않은 그 필름은 오늘 이렇게 다시 소환되리란 걸 알고 있었을까? 그 앞선 기억들이 이후 다시 또 다른 기억들을 부른다. 그것은 마치 실타레와 같이 이어지는 다음 기억을 불러내는 서곡과도 같았다.
습한 공기를 가로질러 연못을 지나 계단에 오르자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보였다. 덕수궁 미술관. 그곳에선 라틴 아메리카를 사랑한 콜롬비아 출신 화가인 페르난도 보테르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보테로는 과장된 크기로 부풀려진 인물과 동물상, 독특한 양감이 드러나는 정물을 묘사했으며, 그의 독특한 유머감각을 바탕으로 현실의 부조리와 현대 사회상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시원한 공기가 품어져 나오는 그곳으로 온몸을 밀어 넣는다. 그제서야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천천히 그날의 작품들 속을 거닐다 하나의 작품 앞에 멈춰섰다.
그곳엔 서로 다른 머리색을 가진 다섯 자매들이 푸른색 벽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듯 모여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녀들은 모두 풍만했다. 그녀들 뿐 아니라 그곳에 전시된 프레임 안 모든 이들이 남녀노소, 직업과 신분을 막론하고 풍만하다. 그들은 영원히 풍만하다. 누군가의 마음과 몸이 지쳐 기대고플 때면 포근하고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것처럼 부드러운 색감으로. 그렇게 행복한 그림속으로 빠져들려 할 때 그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머뭇거리게 된다. 그녀들은 경직되거나 긴장되어 있었고 그 중 아무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난도 보테르의 “The Sisters”란 작품 속 주인공들이었다. 왜 페르난도는 그녀들 중 한명이라도 웃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하지 않았을까. 궁금함에 그림 속으로 다가가자 그들 속에 또 하나의 다른 모습들이 보였다. 손목이 보이지 않게 서있는 한 여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명의 여인이 모두 손목에 얇은 줄로 만들어진 아날로그 시계를 착용하고 있었다. ‘뚱뚱함의 미학’이라 불리듯 크기가 부풀려진 그의 작품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그녀들과는 다르게 너무나 얇고 작아 보이는 시계. 더군다나 그녀들의 시계는 모두 각기 다른 시간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 공간에 있는 그녀들이지만 마치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온 것처럼. 그들은 그날 모두 한곳으로 소환되어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들이 사는 시간은 서로 다른 세상인 것일까.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었던 그녀들이 궁금했다. 한참의 수다러움마저 잠재우며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지을 것만 같은 그녀들은 왜 마치 홀로인 듯한 모습으로 그곳에 함께 있었던 것일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는 다시 소환된 기억 속에서 작품을 만난다. 편안함을 주었던 많은 풍경과 아름다운 작품들 속에서 왜 유독 불편해 보이듯 웃고 있지 않고, 각자의 시계 속에 서로 다른 시간대를 갖고 있던 그들이 마음에 남아있는 것일까. 이러한 것들은 의문으로 남아 스스로 되묻게 하곤 한다. 작가의 작품 의도를 알고 찾기 전에 이제는 작가의 손을 떠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작품과 우리가 만나기에 나는 작가의 의도를 찾기보단 작품이 내게 이야기 해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답으로 삶 속에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는 서로 한 공간에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기 힘든 시간대에 살고 있다. 온라인 미팅을 하는 인터넷 공간 속 프레임은 작품 속 프레임과 같이 각자의 시간대를 갖고 전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한 공간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프레임 속으로 각자의 시계를 갖고 있던 페르난도의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입장한다. 사람들은 그 프레임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게 노출시키기도 하지만 때론 보이지 않게 비디오나 소리 옵션을 꺼놓기도 하며 그 프레임에 내가 시선과 생각을 집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게 무심히 놓아두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기에 그들의 미소 또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순간 그들은 오프라인으로 만날 수 없는 이들을 온라인으로 만나기 위해 링크라는 티켓을 받아 접속된 인터넷 공간 속 프레임에 소환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으로 왔건 공통의 주제로 함께 하는 공동의 프레임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제 이 프레임은 멈춰진 한 컷의 작품 속 프레임이 아닌 살아있는 우리 삶의 일상에 존재하는 프레임이 되었다. 나는 페르난도의 작품 ‘The Sisters’에서 그녀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소환되어 왔을 지라도 그 프레임 안에서 서로에게 얼굴을 돌려 그곳에 있는 그들을 영혼으로 알아차리길 바란다. 그렇다면 그들은 다시 미소지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바이러스로 인해 비대면 상황이 길어지며 오늘 우리가 온라인 상에서 만나는 프레임도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창과 같기에. 가끔은 어떠한 설명보다 이모티콘 하나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며 다가오는 온라인 세상 속에서도 진정한 서로의 미소를 알아차릴 수 있기를 소환된 기억 속 작품이 속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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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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