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인한 봄은 가고 초여름의 활력이 다시 희망을 피어내다
▶ 위생 점검하고, 새 메뉴 선보이고, 마케팅도 다시…
아카시아 꽃 지나간 자리에 붉은 장미꽃이 피었다. 초하의 훈풍에 문득 전해오는 몽환적 향기가 아찔하다.
버지니아 주의 경제 재개 3단계 개방을 이틀 앞둔 6월29일 낮, 워싱턴 지역의 한인 타운인 애난데일을 둘러봤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인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이 작은 도시에서는 코로나19 사태로 상실된 일상의 쓸쓸함을 뒤로 하고 다시 생업에 뛰어든 이들의 불안한 기대감이 지난 봄의 적막감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 “Dine In” 간판이 여기저기에
495 벨트웨이를 빠져나와 236번 도로로 접어들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브리즈 빵집. 얼마 전까지 “To Go Only.”란 전례 없는 팻말이 입구에 붙어 있었지만 이젠 “Dine In”이 대신하고 있다. 한인과 미국인 고객들이 2층에서 커피와 빵을 들고 있는 정경이 반갑기 그지없다.
예촌식당은 아직 실내 영업은 않지만 주차장에 야외 테이블을 만들어 영업을 할 채비를 마쳤다. 한식당에도 실외 영업 시대가 열린 것이다.
본보가 있는 건물 1층에 사무실을 둔 한스관광은 코로나 19의 여파로 3층으로 옮겼다. 데이빗 한 대표는 “여행업계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조금씩 여행 수요가 살아날 것”이라며 “우선 미국과 해외의 청정 관광지와 워싱턴 인근 지역 투어 상품을 통해 새로운 기대를 걸고 있다”고 조심스레 기대감을 나타냈다.
한인 사무실이 대거 입주해 있는 7535 빌딩 입구에서는 한인들이 연신 들락거렸다. 불과 한 달 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저항할 수 없는 좌절감으로 가득 찼던 얼굴들에서는 희미한 웃음이 배어나왔다.
# 한인 식당 살립시다
디자인 안경도 영업을 재개했고 건강마을의 매장에는 건강을 구하려는 한인들이 여럿 보였다. 입구에는 “마스크 착용, 2미터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안내문이 수학공식처럼 달라 붙어 있다. 바로 옆의 메시야장로교회도 문을 열었다. 다만 발열 체크를 하며 “성도 외에는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문이 이 격리시대의 안타까움을 전해주고 있었다.
낙원식당과 설악가든도 오픈했다. 마사지 의자를 주로 판매하는 힐링나라에서는 새로운 활력이 느껴졌다.
신라제과가 있는 몰의 주차장에도 예전보다 차량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띵가매직, 신세계약국, 철기시대에서는 “OPEN”이란 전광판이 고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토속촌은 바깥에 대형 메뉴판을 붙여놓고 “메뉴를 미리 정한 후 들어오세요”란 안내문을 곁들였다.
탑 여행사가 있는 빌딩에서 만난 박공석 척추신경 원장은 한식당 살리기를 위해 한인사회가 한마음으로 나섰으면 좋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는 “힘든 시간을 보낸 한식당들이 문을 열면서 점심은 꼭 직원이나 지인들과 함께 한식당에 일부로 찾아가 먹는다”면서 “한식당 살리기에 한인들이 모두 조금 더 신경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폐광촌 같던 애난데일에도 열기가
지난 3월, 미국은 그리고 한인사회는 느닷없이 불어 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광풍에 모두가 무너졌다. 비즈니스는 문을 닫고 직원들은 직장을 잃었다. 학교도 휴교령을 내렸다. 사람들은 언제 모진 바이러스가 달라붙을까 전전긍긍했다. 3월25일에는 외출제한령이 내려졌고 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만 간혹 눈에 띄었다. 애난데일은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폐광촌처럼 변모하고 있었다. 우리는 난생 처음 겪는 이 섬뜩한 한산함이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미지의 추상이길 바랬다.
잔인한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애난데일 최대의 한인 사무실 입주 타운인 에버그린 콘도미니엄에서도 초여름의 열기가 전해졌다. 홍무경 소화기내과, BH 봉황 부동산, 경희바울 한의원 등 업소에는, 저마다 집이란 둥지를 틀고 겨울 곰처럼 은거하고 있던 한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느미라지 미용실에서 만난 고객들은 지난 3개월 길어진 머리를 단장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그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예기치 않은 외출제한령에 우리의 머리카락은 단발령 이전의 유생들처럼 길어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선 모습에 당혹스러워 하던 게 엊그제 같다.
# 소주잔 부딪치던 그날이 그리워
문 한의원에도 한동안 뜸했던 환자들이 다시 찾기 시작했다. 애난데일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인 가보자 횟집에 들어서니 스시, 사시미, 활어, 우니, 해삼, 멍게, 산낙지란 안내광고가 문에 붙어 있다. 점심 때 쓸 횟감을 다듬고 있던 한 스시맨은 “이제 사람들이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조금씩 찾아오기 시작한다”며 “머지않아 식당은 예전의 활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문득 소주잔을 부딪치며 왁자지껄하던 그 시절의 온기가 그리워졌다. 이 속박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답답함, 뭔가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을 벗어던지고 곧 다정한 벗들과 잔을 기울이겠다고 다짐해본다.
본격적인 영업 재개를 앞두고 업소들은 위생 점검과 함께 새로운 메뉴나 마케팅으로 고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애난데일 떡집은 방역업소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았고 한식당 애난골은 29.99달러짜리 ‘미스터 족발’이란 새로운 메뉴를 선보였다. 맞은편의 충만치킨은 닭 한 마리를 시키면 다리 콤보나 텐더를 공짜로 주는 세일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꿀돼지 식당은 입구에서부터 발열 검사를 한 후 들여보냈다.
# “모두들 힘내시라”
곰바우 설렁탕과 웰빙 모어의 창 안에서도 고객들이 음식을 들거나 물건을 고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홍삼 등을 파는 정관장은 “홍삼이 면역력을 높여주는 건강식품이라 반응이 좋다”며 “모두들 힘내시라”고 동포들에 대한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우리은행이 있는 서울플라자의 낮 풍경도 부산스럽지는 않으나 점점 활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청사포는 실내 영업을 재개했고 시루는 투고 손님들로 붐볐다.
코로나 19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의 현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업소들은 제각기 방역과 위생을 철저히 하고 고객들에 더 다가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두보의 ‘춘망(春望)’이란 시에서처럼 전란의 폐허 속에서도 꽃은 피어났다. 애난데일의 한인들은 이 폐허의 시간 속에서도 희망을 피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중이다.
새삼스럽지만 삶은 언제나 진지함으로 가득하다. 우린 곧 절망의 여정을 끝내고, 사막에도 꽃이 피듯 새로운 희망의 꽃을 피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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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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