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은 원래부터 꽃을 좋아했지만 나는 최근에야 꽃들에 조금 관심을 갖게 되었다. 꽃에 대한 감성이 생기다니 나이들어간다는 표징인가보다. 지금은 자가격리중이기에 자유로운 외출이 금지된 상태이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집사람의 요청으로 꽃피는 봄철에는 근교 야산들을 두어차례 찾곤 했다. 산책을 겸해 유명 무명 들꽃들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3년전인가 5월 초인데 비가 꽤 왔었다. 비 그친후 집사람과 함께 집에서 40분 거리의 야트막한 산길을 걸었다. 초록색 잎사귀들로 풍성해진 나무 숲길, 이어 나타나는 확뜨인 들판, 노랑 주황 보라 분홍 하얀색을 입은 작은 야생화들, 그들 뒤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여러 작은 산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전경과 만으로 들어온 바다, 집시선율같은 새소리 벌레소리 바람소리, 조각 솜구름, 유난히 높고 푸른 하늘등 산길에서 만나고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자연들이 참 좋았다. 산책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정겨웠다. 헌데 정말 좋았던 것은 산책내내 내리던 따사한 햇볕이었다. 그때의 햇볕은 삶의 무게에 눌려 다소간 지치고 움추러 들었던 몸과 영혼에 생기, 평온, 자유를 풍성하게 공급해 주었다.
당시 여유롭게 산책을 하면서 문뜩 햇볕 한 조각에 행복을 담아내시던 한 노부부가 생각났다. 풍으로 신체 한쪽이 마비되었지만 정신은 꼿꼿했던 할아버지와 그를 극진히 돌보는 사랑과 유머넘치는 할머니 부부였다. 그분들은 3년전 그떄 이미 세상을 떠나신 상태였다. 나는 오래전 춥고 건조한 초 봄날 오후에 자식들없이 부부만 한적하게 사는 집을 방문해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대화를 나누던중 할머니가 나에게 부탁을 했다. “할아버지를 부축해 잠시만 마당에 나가게 해주실래요? 아침 저녁나절은 기온이 차가와 할아버지 몸이 더욱 굳어지지만 오후 2시에는 햇볕이 많이 따스해 몸이 한결 부드러워지거든요. 남편 몸이 부드러워지면 내 마음이 즐겁고 행복해진답니다.” 할머니 말을 들으면서 이 부부에게 오후 두시의 햇볕보다 따스한게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분들에게 오후 햇볕은 애뜻한 사랑, 희망, 안연함, 풍성함, 그리고 행복이었다. 그러고보니 이른 아침 눈 뜨면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태양 볕, 문만 열면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솜털구름 안고 더욱 푸르러진 하늘에 설렘과 희열, 희망을 담아 본 적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었던가? 외형상 크고 화려하고 멋있고 특별한 것들이 아닌 작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에 우리들은 얼마나 의미와 가치를 주었던가?
삶의 모퉁이에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한 행복과 기쁨의 요소들이 의외로 많다. 행복, 즐거움, 상쾌함은 먼 풍경으로부터만 찾아오는게 아니며 유명세타고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화려한 곳에만 있는게 아니다. 살아가는 현장과 주변에서도 행복을 일으키고 가슴을 울리케 하는 소소한 풍경, 사연,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식구들과 함께 하는 조촐한 밥상, 깔깔거리는 자녀들 웃음소리, 애완용 동물과의 산책, 동네 산에서 보는 아침여명과 저녁노을, 휴식시간에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향기로운 커피 한잔, 도란도란 얘기나누다 스륵잠드는 침상, 친구들과의 열띤 운동과 논쟁 대화, 식구들과 영혼을 함께 하여 드리는 가정예배등 모두가 행복의 내용들이다. 삶의 처처에서 행복이 파랑새되어 날아다닌다. 네잎 크로버는 찾기 힘들어도 행복은 일상의 도처에 스며 있다. 게다가 행복은 그냥 멈춘 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한뼘 두뼘 자라가고 익어간다. 코로나 재난중에도 행복은 잔잔히 불어가며 삶의 역경과 고통중에서도 순간순간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날 산책 길에서 우리 부부가 즐기며 누렸던 것은 눈에 보이는 자연풍경 이상의 행복이었다. 오래전 노부부가 누렸던 오후 2시의 햇볕 안에 내재된 행복같은.. 우리네 일상의 마당에도 햇볕이 따뜻하게 쏱아진다.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행복과 기쁨 소망도 함께 내려 몸과 영혼의 상처를 회복시키고 달래준다. 주님께서는 매순간 오후 2시의 햇볕이 되어 주셔서 살아가는 날들을 따사롭고 평온하고 복되게 하신다.
<임택규 목사 (산호세 동산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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