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큰 아들이 장차 은행의 지점장이 되어 가문의 영광(?) 을 다시 세워주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학교 정규 수업이 끝나면 매일 담임 선생님 댁을 드나들면서 주산 특수 교육을 받았다. 그 방면에 재능이 있었는지 그 당시 상업학교 명문이었던 덕수상고에서 매년 열리는 전국 도 대항 주산 경시대회에 충청남도 대표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물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실력이 월등한 경쟁자들에 밀려 낙방했지만 실업 중·고교를 택한 동료 주산반 친구들과는 달리, 어머님의 치맛바람 덕에 당시 지방 명문이었던 대전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전교 유일한 주산 특기생인지라 3년 내내 전교생의 월말과 기말 고사 채점을 암산으로 도맡아서 하게 됐고 (계산기가 없던 시절이라) 그 경험이 평생 암산의 재능을 그대로 유지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적성 검사 시 장래 직업에 ‘회계사’와 ‘비서’가 만점으로 나왔던 기억은 강렬하게 내 미래 직업에 대한 예감을 하게 만들었다. 대학 시절, 미국 유학파였던 한 교수님에게서 미국에서 존경받고 돈 잘 버는 3대 전문직종이 의사와 변호사, 공인회계사라는 조언을 듣고 언젠가는 전문인의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됐다.
대학 졸업 후 한국 굴지의 종합상사(LG)에 당당하게 취업했는데 유신 말기의 사회적 변혁기에 문제의식을 느끼게 됐다. 수직적인 한국 기업 문화에 금방 염증을 느끼고 미래에 대해 방황하다가 불현듯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미국 공인회계사의 길을 걷기로 작정, 1년만에 회사에 사표를 내 던지고 혈혈단신 샌프란시스코로 자비 유학을 왔다.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파산 하여 모든 비용을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야말로 동가숙 서가식하며 비참하고 처절, 험난한 나날의 연속이었던, 가난한 유학 생활을 한동안 겪어야 했다. 하지만 꿈을 잃지 않고 회계학 공부를 열심히 했고 주말에는 Flea Market 행상, 가가호호 방문하는 세일즈맨 등으로 생활비 조달을 하며 열심히 살아갔다. 마침내 대학원을 졸업하고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해 천신만고끝에 북가주 굴지의 대형 미국 공인회계법인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인터뷰 당시 평소 갈고 닦았던 암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면접관 모두를 놀라게 했던 기억이 난다. 전문가로써 성공하기위해 때를 기다리며 부지런히 실력을 닦다가 영주권을 획득하자 지체하지않고 미국 유학 9년 만인 1989년 평생 꿈에 그리던 내 공인 회계 사무실을 열게 됐다. 미국 대학에서 마케팅을 부전공으로 한 덕으로 사업에서 홍보의 중요성을 체감하였고 고객층을 다양하게 확보하기 위한 여러 작업을 순차적으로 실행했다.
미국 납세자의 60% 이상이 세금보고를 전문인에게 의뢰한다는 통계에 힘입어 사무실 근처 주민, 사업체 등을 상대로 팜플렛과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 매일 새벽 조깅하며 돌리곤 했다. 유학생 알바 시절, 베이지역 그로서리 마켓들을 상대로 일회용 라이터나 선글라스 등을 정기적으로 납품하곤 했는데 주로 아랍 고객인 그들이 흔쾌히 세금 보고와 장부 처리를 맡겨주어 초창기 사무실 운영에 큰 힘이 됐다. 또한 한국일보의 후원에 힘입어 북가주 한인 주거지, 사업체 현황을 장시간에 걸쳐 파악해 논문을 발표하게 됐다. 한국일보사와 공동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후엔 사업인 양성 전문 경영 기관인 ‘북가주 경영학교’를 설립해 10년간 자비를 들여 열심히 운영, 북가주 한인사회 발전에 초석이 되고자 노력했다.
나에게 공인회계사라는 직업에 대한 가장 큰 자부심은, 이 직업이 사업 고객의 흥망성쇠와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한인들을 비롯한 대부분 이민 1세였던 아시아계 고객들이 인종차별이나 언어 장벽, 문화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삶을 일구는데 감명을 받고 고객들의 사업이 순항하고 재정적으로 탄탄해지도록 내 직업윤리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자 했다. 간혹 정부기관에서 고객 사업체 감사가 나오면 혼신을 다해 고객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매년 1월부터 4월까지 개인 사업체 세금보고 시즌을 치뤄야 했는데 비록 3개월동안 거의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극한 작업이기는 해도 그 많은 고객들을 1년에 1번씩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서로의 삶을 교류하며 얻는 쾌감은 내가 왜 이 직업을 택했고 사랑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준다.
세금보고 대행을 하는 짧은 시간이지만 한국인은 물론이고 흑인, 백인, 아랍인, 아시안 등 다양한 인종과 교류를 하게 된다. 또,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가 발달함에 따라 미 동부와 남부, 한국, 유럽 등 멀리 있는 고객들과도 전혀 불편함 없이 서류를 교환하고 의사소통을 한다. 10대에서 100세에 이르는 광범위한 연령층과 희노애락을 공유하며 서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너무나 행복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 준다.
벌써 32년째 세금보고 시즌을 치루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초창기 이민자 삶의 희노애락을 같이 나누었던 나이 드신 고객들이 은퇴하면 그동안의 인연과 추억에 대해 덕담을 나누며 건강한 노후생활을 기원한다. 또, 고객들의 부음을 간간히 전해 들으면 그 분과 오랫동안 이어진 인연을 되새기며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어릴 때 본 고객의 자녀들이 성장하여 사회인이 되면서 새로운 고객이 되어 나를 찾아 올 때면 마치 친 자식처럼 대견하게 여겨지곤 한다.
사무실 직원들도 차츰 평균 연령대가 어려져 이제는 자식 아니 그 보다 더 어린 20-30대와 같이 호흡하며 지내고 있다. 모든 회계 업무가 인터넷화 되어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며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덕분에 나도 젊은 감각을 다소 유지하게 되어 이 또한 다행이고 행운인 것 같다. 특히 이번 2019년 세금보고 시즌은 두고 두고 기억에 날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모든 것을 삼켜버려서 세금 마감도 7월 15로 연장되었고 많은 고객들이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지난달 내내 EIDL, PPP, PUA 등 각종 정부 지원금 관련 업무를 돕느라 나를 비롯한 온 직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해야 했다. 이 또한 큰 보람으로 남을 것이다. 연례 세금보고 또한 누구나 매년 한 번씩 거쳐야 하는 절차이므로 고객들과의 만남은 지속되고 있다. 이번 사태로 서로 위로하고 건강을 챙기면서 더욱더 정스러워진다. 덩달아 이 직업을 선택했던 내
<
성주형 공인회계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