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계단은 먼 기억 속 천장 다락방을 오르던 대여섯의 작은 계단부터 어둡고 차가운 공기가 올라오던 높고 긴 지하 계단까지 시야를 벗어난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입구이자 출구이기도 하다. 그곳에도 계단이 있었다. 결이 부드러운 나무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손잡이를 잡고 계단 아래에 이르자, 작가의 삶이 그대로 녹아든 작업실이 있었다. 약 40년전 한국을 떠나 베이지역에서 활동 중인 조각가 최세훈과 어수자 작가의 공간. 얼마나 오래 동안 그곳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염원했기에, 영혼이 깃든 새 생명과 같이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 나오는 것일까? 안료와 작품을 위한 재료들이 놓인 테이블을 지나자 이제 막 평면의 벽을 뚫고 나오는 듯, 작품 속 한 사람이 보였다. 아직 한 발은 2차원 평면의 세계에 있으며 다른 한발은 3차원 현실세계로 공간 이동을 하려는 듯. 평면에서의 그의 세계는 혼자서는 뚫고 나오기 힘든 금속재질의 철판이며 그의 어깨와 몸은 그 세계를 빠져 나오려 힘겨운 탈출을 시도한다. ‘이제 다른 세계로 한걸음 더’. 작품 속 인물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듯 했고, 어느새 그곳의 공간도 나도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계단을 돌아 나오는길에 벽면에 걸린 아크릴 속 작품에서 춤추듯 흘렁이던 또 한 사람이 나를 붙든다. 그도 평면 속 그의 세계에서 이제 막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전세계가 새로운 탈출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신종 바이러스들로부터 어떻게 인류의 안전을 지켜 낼 수 있을 것인지를. 연일 뉴스에서는 중국 우한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하루밤이 지나면 확증 환자수가 대폭 갱신되며 사망자 수도 늘어나고 있는 와중에 SNS를 통해 중국 우한 지역의 절실한 상황이 보도되며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다. 의료진들 또한 매일 쉼없이 불안과 극한의 피로 속에서 감염 환자들을 돌보고 있으며 이로인해 2차 감염이 되기도 한다. 총과 칼이 없는 보이지 않는 전쟁터. 그러나 그곳에 달려 가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곳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중국 타지역에서는 우한지역에 추가로 의료진을 파견하고 있다. 우한으로 떠나는 기차의 유리창을 통해 작별인사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은 전쟁터로 떠나는 이와 이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의 눈빛에서 ‘(무사히) 잘 돌아 올께’라는 간절함이 묻어나온다.
반면, 우한지역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대피시키고자 한국을 비롯,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이 전세 항공편을 투입, 자국민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언제쯤 떠날수 있을지 모를 상황에서 언제라도 떠날수 있도록 준비하며 집 밖을 나오지 않는 사람들. 타국인들은 불안 속에서도 탈출의 희망을 갖고 시간을 견뎌내고 있지만, 가족이 확진되어 병원에 있거나, 떠날 수 없는 이들은 치료약과 백신, 바이러스 퇴치 등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더딘 희망을 품고 탈출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하룻밤은 천년과도 같은 시간일 것이다.
다시 작업실의 계단 위를 오른다. 평면 세계에서 이제 막 탈출에 성공한 작품속 그들과 나.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계단 위로 함께 올라왔다. 작가를 통해 무에서 존재로 탈바꿈한 그들은 이미 작품 속에 갇혀 있지 않고, 또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계단 위의 세계에 오르자 그곳에선 ‘하룻밤이 천년’이란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이 곡은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서 롯데가 부르던 노래로, 이 곡을 비롯하여 뮤지컬 전곡을 작곡한 작곡가 정민선 교수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소설가 신예선 선생과 그곳에 모인 이들의 기억 속에 하루밤에 천년의 시간을 선물하던 날. 그날의 음악은 탈출에 성공한 그들이 지상 위로 올라와 처음 듣는, 이름 그대로 하루밤이 천년 같았던 음악이었을 것이다. 계단 밑 지하에서 꿈꾸듯 멀리 들려오던 음악이 긴 기다림 끝에 작품 속에서 농밀하게 익어가고 성숙되었을 그들의 가슴과 귀에 들리지 않았을리 없기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이로 탈출 이후에 맞는 환희를 그들은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 환희의 순간이, 지금 불안과 공포 속에 하루 밤을 천년처럼 보내고 있을 우한에 머물고 있을 이들과 지구상 또 다른 곳에서 바이러스가 전파되지 않기를 바라며 안전한 탈출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지구와 같은 행성을 발견하기 전까지, 지구를 떠나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우리가 지구 안에서 살아 갈 수 있는 곳을 찾아 탈출을 거듭하는 모습은 비단, 중국 우한의 모습만이 아니기에. 하룻밤이 천년이었다던 소식 끝에 희망의 새벽이 동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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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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