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봄, 친구들이 모여 감나무 묘목들을 우편주문 했다. 식목할 여건상 언감생심인 나만 빼곤. 그랬는데 Y가 내 몫이라면서 연시감묘목을 덥석 안겼다. 어디다 심을 지 행복한 고민 중에 떠오른 대안이 있다. 몇 년 전, 뒤뜰 작은 꽃밭 구석에 땅을 파고 큰 빨래통을 넣어 자칭 연못이라며 금붕어를 키웠다. 내손으로 만든 물웅덩이 수준이라 자칫하면 모기양식장이 되는 바람에 난감하곤 했었다. 또 길고양이가 금붕어들을 다 포식해버린 전적도 있던 터. 이참에 마음을 비워 웅덩이 연못을 감나무로 메워버렸던 것.
친구들 감나무는 2년이 되자 꽃과 감 소식을 전해왔다. 허나 우리감나무는 세 살이 되어도 그저 늘 푸른 잎뿐이다. 앞집의 거대한 상수리나무의 깊은 그늘 탓으로 유추할 뿐, 방법이 없다. Y의 깊은 정이 실린 감나무기에 더 안타까웠다. 파리가 사라진 늦가을부터는 감나무 밑에다 과일껍질 등을 묻어주며 부지런히 기를 북돋아줬다. 그렇게 심혈을 다해 보듬건만 내내 가지만 뻗어나갔다.
그러다가 작년에 비대한 상수리나무가 왕창 가지치기를 당했다. 늘 상 햇빛을 간절히 그리워하던 감나무에겐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 이후 하늘이 트이고 강한 햇살이 많이 안아주자 잎이 더 푸르러지고 윤기가 돌았다. 드디어 5년 만에 처음 고대하던 꽃도 달아 나를 감격시켰다. 여태 감꽃 실물을 본 적이 없으니까. 다른 과수나무 꽃처럼 하늘하늘 화사하지 않고 단아한 단추 같다. 검소하고 소소한 자태지만 볼수록 마음이 은은하게 당기는 더덕꽃 이미지다. 신기하게도 꽃잎처럼 펼쳐진 꽃받침위로 납작한 상수리열매 같은 앙증맞은 애기감이 다닥다닥 열렸다. 비로소 내게도 감 풍년이 오나 하는 기대로 ‘내 마음은 풍선’이었다. 그런데 그 ‘꽃열매’들이 무정하게도 자꾸만 추락했다.
그 와중에도 탈 없이 살구만치 커주는 것들이 제법 많아 고마웠다. 허나 비바람이 치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는지 미련 없이 투신해버린 ‘살구감’ 들이 땅에 즐비하곤 했다. 친구들 감나무도 많이 떨어진다지만, 이러다 하나도 안 남을까 은근히 마음 졸였다. 다행히 사계절의 변화와 심술에도 무사히 적응해 온 나무가 드디어 열매를 자두만큼 영글게 했다. 한여름이 되자, 남아있는 걸 세어보니 고작 12개다. 첫 해인데 잘했다며 감나무를 치하해 줬다. 바람 타는 잎사귀들 뒤에서 숨바꼭질하자는 감들과 눈도장 찍는 게 행복한 일과였다.
밤새 태풍경보가 발효됐던 다음날, 세상에!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몇 번을 세어 봐도 딱 두 개뿐이다. 우려했던 사태다. 애통하게도 높은 가지나 중간쯤에 달렸던 감들은 깡그리 전멸이다. 제일 밑쪽의 가는 가지 끝에 낮게 달린 두 개만 온전하다. 인간사마냥 겸허하고 낮은 자세가 끝까지 버티고 이긴다는 사실만 새삼 인지했다.
하여간 거의 다 자라 안심시켜 놓고는 뒤통수치듯 나뒹구는 감들. 너무나 애석하지만 본드로 붙여 줄 수도, 인큐베이터에 넣을 수도 없다. 속수무책이니 더 허망해 부엌 창가에 놓았다.
혹여 토마토나 바나나처럼 햇빛을 받아 익기를 소원했지만, 끝내 뇌사상태라 고별할 밖에 없다. 달랑 남은 두 개라도 감사하고 위안 삼을 밖에. 포옥 감싼 감잎들에 살짝 가려질 때면 가슴이 철렁하곤 했지만.
조마조마 애를 태우는 내 속을 아는지 무난히 제 사이즈로 여물어갔다. 가을이 익어가자, 신통하게도 연한 오렌지색으로 물들더니 점차 짙어졌다. 감잎들이 하나 둘 속절없이 떨어져도 늠름히 제 자리를 지켰다. 동생과 Y의 집의 감나무는 꽤나 크다. 그런데 다람쥐들이 심심하면 한 입 두 입 맛만 보곤 휙휙 땅에 내던진단다. 새들도 툭하면 쪼아대 상처투성이 감으로 된단다. 운 좋게도 우리 감은 단 두개지만, 워낙 여린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국이라 다람쥐와 새의 접근에서 자유롭다.
밤에 첫 서리가 내렸던 날, 감나무가 어지간히 추위에 떨었던지 제법 무성하게 남았던 감잎들을 일시에 다 떨어냈다. 함초롬히 두툼하게 감잎이불까지 짜서 덮었다. 인제 완전 나목의 텅 빈 가지에 애절하게도 주황색감 두 개만 의연히 드러났다. 두 개의 까치밥만 남은 셈이다. 정말 운치 있는 산수화다.
30cm 간격을 두고 나란히 내려온 가느다란 두 가지가 꼭 기찻길처럼 선명하다. 그 기찻길 끝에 같은 높이로 나란히 달린 쌍둥이 감! 서로 의지하며 삶의 질곡을 치열하게 이겨낸 결실이겠다. 슬며시 미소가 피어난다. 생의 종착역이 가까워져 오롯이 둘만 살고 있는, 우리부부의 모습이 오버랩 돼서다.
볼수록 저 감나무의 일생이나 우리네 인생이나 다를 바 하나 없다.
<
방인숙 / 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