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정부가 세계인구 절반,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1을 차지하는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타결했다고 대대적으로 알린 지 이틀 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아시아 최대 무역협정이 종이호랑이가 돼 가고 있다”는 기사를 올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시아에서 고율관세 비중이 가장 높은 인도가 협정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인디아투데이는 이를 ‘인도 퍼스트(India First)’ 전략이라고 봤다. 중국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도라는 뜻이다.
세계 최대 FTA의 허구는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RCEP는 일본과 첫 FTA를 체결한다는 점과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하나 더 만든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지난주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RCEP는 중국이 아니라 아세안 중심” “일본과의 양허협상에서 민감한 부분 최대 보호” 같은 말로 RCEP가 빈껍데기임을 스스로 보여줬다. 되레 RCEP에서 높은 수준의 개방이 이뤄졌다면 문재인 정부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깨는 마당에 한일 FTA를 맺는 기괴한 전략을 추진하는 꼴이 된다. 윌버 로스 미 상무장관이 “RCEP는 낮은 수준의 협정”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도 단순히 중국 견제용만은 아니다.
RCEP 소동은 이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조차 답변 못하는 청와대 경제수석이나 부도 가능성을 뜻하는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 금리가 0.27%포인트를 기록해 역대 최저라며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보면 분노를 넘어 답답함이 밀려온다. 위기 때마다 한국은 늘 외국인 투자가들의 현금자동인출기(ATM)로 전락한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때가 그랬고 2008년 금융위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 2% 턱걸이 성장에 신음하는 서민들이 “(CDS 금리가 최저니) 우리 경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갖자”는 경제부총리를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따지고 보면 노무현 정부 시즌2라는 문재인 정부는 처음부터 아마추어였다. 미국이 개방을 요구하지도 않은 농업 분야를 막아냈다며 한미 FTA 재협상을 서희와 윈스턴 처칠에 빗대 자축하고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과 밀어붙이기식 주 52시간 근로제로 가뜩이나 기울어가던 경제에 커다란 짐을 안겼다. 끝까지 놓지 않는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는 나라 경제를 안으로부터 곪게 만들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혼란도 청와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하이라이트는 안보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꺼낸 지소미아 종료카드는 외통수가 됐다. 청와대는 “지소미아와 한미동맹은 무관하다”고 했지만 정작 미국은 관련이 많다며 대놓고 연장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의 핵심이 한미일 3각 동맹이기 때문이다. 요미우리신문은 17일 일본이 지소미아와 연계한 수출규제 철회는 없다는 입장을 미국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일본의 양보는커녕 미국의 압박을 불러오고 한미동맹에 안 좋은 신호만 준 셈이다. 주한미군 주둔비 협상까지 겹친 우리 정부로서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청와대가 그렇게 강조하는 국익의 으뜸은 생존이다. 최근 뉴욕을 찾는 경제관료들이 “지금까지 경제가 가장 중요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안보가 더 중요하더라”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일본의 경제보복과 최근의 한미관계를 두고 한 얘기일 것이다. 실제 미 정계에서는 주한미군 감축론이 돌고 있다. 신고립주의로 나아가는 미국이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문제로 우리에게 홍역을 치르게 한 중국,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끄는 일본 모두 간단치 않다.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도 군사적으로는 버겁다.
언제까지 명분과 이상주의에 빠져 국민의 희생을 강요할 것인가. 초강대국 미국·프랑스와 싸워 이긴 호찌민 전 베트남 주석은 “쌍차도 길을 잘못 들면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卒)로도 승리한다”고 했다. 그만큼 전략이 중요하다. 포장과 홍보에만 급급한 지금의 일방통행식 아마추어 일 처리로는 난국을 극복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나와서 다른 얘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주류 언론을 가짜뉴스와 타락이라는 단어로 매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1주일에 2~3번은 기자들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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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필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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