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에게 상처 줬던 건 죄다 숫자였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맞이한 첫 여름 방학, 언니랑 드러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탤런트 김태희 씨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눈 양옆 수치와 얼굴 가로세로 길이를 공개했다. 한가히 집에서 뒹굴고 있는 줄자를 이용해야겠다는 강한 책임감이었을까? 그 아이를 데려와 우리는 서로의 눈, 얼굴 사이즈를 재 본 적이 있다. 아뿔싸, 사람 눈이 원래 저렇게 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난 처음 알았다. 김태희 씨야 그렇다 치고 한배에서 나온 형제도 저렇게 눈이 큰데… 한평생 함께 살아온 내 눈이 작은 것뿐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버렸다. 나는 그 충격의 여름날, 양말 말리는 퀴퀴한 썩은 내부터 오토바이 경적까지 선명히 기억한다.
그렇게 숫자가 난무하고 상처와 비교로 가득한 나의 사춘기가 서막을 열었다. 웃으면 눈 작아질까 봐 사진도 안 찍겠다고 난리를 치는 그 공포의 시기. 이차 성징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친구들은 가슴 사이즈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컵 사이즈 앞에 오는 칠, 팔십 언저리 숫자가 크면 무조건 가슴이 크다는 뜻인 줄 알고 부풀려 이야기하다가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 숫자는 아랫가슴 둘레라 어쩌면 작을수록 좋은 것인데. 이게 다 “34-24-34” 외치는 미스코리아들을 향한 동경과 짜증에서 비롯되었다.
생각해보면 얼굴이 작다는 칭찬도, 사진 찍을 때 뒤로 가는 관습들도 참 웃기다. 유난히 얼굴이 큰 우리 아빠는 직장 동료들과 옹기종기 모여 두루마리 휴지로 얼굴 크기를 재고 와서는 일등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빠의 얼굴 크기가 두루마리 휴지 몇 칸에 들어가는지 이제는 다 까먹었지만 나는 분명 화장실에 들어가 몰래 두루마리 휴지를 얼굴에 둘러보며 매우 불안해하기도 했다. 예능을 다큐멘터리로 받고 혼자 울다 잠드는 무서운 중학교 2학년이었다.
앞으로는 사진도 안 찍겠다고 선언한 프리미엄 사춘기 앞뒤로도 몸무게, 성적, 대학 순위 등 숫자들은 꾸준히 나를 괴롭혀왔고 지금도 그 성실함은 여전하다. 요즘 들어서는 나이가 그렇게 신경 쓰인다. 만년 막내이던 내가 졸업 이후로도 캠퍼스 근처에 있게 되면서 20대 초반의 친구들을 자주 보게 되었다. 이미 이뤄놓은 것 많은 것도 짜증 나는데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으면 “너는 그 나이 먹기까지 뭐 했니?” 하고 혼자 되묻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숫자가 주는 가장 깊은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비교에서 우위를 차지했을 때였다. 나를 따라오는 숫자들이 유리하게 작용할 때 악랄해지고는 했다. 그 숫자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며 지금까지 받았던 괴롭힘을 보상받으려고 몸부림치기도 하고 무슨 권력이라도 생긴 것처럼 남들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숱한 비교로 스스로 상처를 내놓고도 같은 시스템 안에서 남에게 상처를 줄 때,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진정 나 자신이 역겨워진다. 내게 부럽다는 말을 건넨 상대가 비교로 고통받고 질투로 초조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느끼는 희열, 그 뒤에 잇따르는 공허함은 더 깊은 상처로 돌아온다.
연예인들은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특히 아이돌같이 중고등 학생 친구들이 한참 빠져있는 연예인이라면 부러움을 받는 게 그들의 일이나 다름없다. 어린 나이, 큰 눈, 작은 얼굴, 큰 키로 대중 앞에 선다. 우리는 넋을 놓고 그들을 보며 반응한다. 주로 비교와 자책, 질투, 부러움의 선상 어딘가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쪼잘거린다. 그렇게 몇백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게 되고 별처럼 수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별이 되기도 한다.
잇따라 연예인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나를 줄곧 괴롭혀왔던 숫자들을 이기고도 남을 잘난 사람들도 그렇게 상처가 많다는 게. 잘난 그들에게 내 상처를 등떠밀고 싶지만 다 같은 희생자일 수도 있겠다. 숫자는 역시 편의를 위해 존재하고 이에 의미부여 하는 일은 참 고통스럽고 중독성 있다. 우리 모두 숫자한테 상처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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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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