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10월에 한국일보 미주본사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만 30년이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각계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사건취재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특히 90년대 초중반에 LA폭동과 노스리지 지진, 말리부 대화재 등 대형 사건을 취재하면서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가슴 깊숙이 회한이 남기도 했다.
92년 LA폭동 때 경찰도 방어하기를 포기한 사우스 LA 깊숙한 곳까지 진입해 폭도들이 한인 리커와 마켓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현장을 취재하고 돌아오다가 주변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폭도들이 탄 차를 들이받아 전속력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만약에 당시에 폭도에게 잡혔다면 트럭 운전사 레지널드 데니처럼 차에서 끌어내려져 집단폭행을 당했을 정도로 일촉즉발의 위기도 겪었다.
94년 노스리지 지진 당시 진도 6.7의 대지진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장남을 졸지에 잃어버린 이현숙씨의 이야기를 통해 지진으로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지 조명하면서 폭동과 지진으로 큰 피해를 당한 한인사회의 복구를 돕는 일에 동참하기도 했다.
TV 방송국 기자로 일했던 96년9월, 김영삼 대통령이 LA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경쟁사에 놓치는 바람에 다음 날 새벽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부터 베버리힐스 하이스쿨에서 대통령이 혹시 조깅하러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대기한 적이 있다. 마침내 현장에 나타난 대통령에게 마이크를 갑자기 갖다대니까 경호원이 팔목을 세게 내리쳐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마이크를 꽉 붙잡고 인터뷰를 끝까지 진행했다. 새벽 미명의 갑작스런 인터뷰에 응해준 김 대통령에게 감사할 뿐이다.
97년 여경찰 매리앤 구의 스토리를 취재하다가 그녀의 일정이 매춘단속으로 갑자기 잡히는 바람에 한인여성들의 매춘실태를 운좋게 단독 보도했지만 한인사회의 치부가 드러난 것 같아 꺼림칙했다. 때로는 가슴속 깊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훈훈한 스토리도 있었다. 2001년 12월25일자로 간암으로 간이식을 원하는 김현숙씨 스토리를 소개하자 신문사로 50~60통의 전화가 걸려오면서 다음 해에 김종국씨가 간을 이식해주어 그녀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이 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2001년 11월 본보의 특별기획 “이민 1백년 땀과 눈물의 대서사시 멕시코편” 취재시 멕시코에 버려진 유카탄의 한인 후예들을 취재하면서 페드로 산체스라는 한인 3세 노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평생동안 부엌이나 화장실, 샤워시설도 없이 간이침대만 놓여있는 비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나중에 이 기사를 본 한 독자가 메리다 한인들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는 기록을 확인하고 한국의 관련기관에 탄원서를 보내 메리다의 한인후예들 21명이 뒤늦게 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기자는 ‘한국일보 미주본사 창간 40주년 기념 위트니 등정팀’ 9명의 일원으로 눈이 오는 궂은 날씨에 2009년 6월7일 위트니를 등정하다가 빙벽에서 추락하면서 의식을 잃다시피한 30초나 될까 말까한 짧은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눈덮인 설벽을 오르면서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을 잃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150여미터를 미끄러지는 위험한 상황에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먼저 스쳤고 다음 순간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온몸을 펴’라는 구호를 두어 차례 외치면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엑스로 설벽을 내려치면서 더 이상의 추락을 막아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위트니 등정팀이 우여곡절끝에 마침내 등정에 성공해 한국일보의 기상과 도전정신을 보여준 일은 영원히 기억에 남는다. 그때 현재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삶은 너무나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저널리스트도 때로는 살아있는 교사역할을 해줬다. 지난 8월에 별세한 카니 강 기자의 자서전적인 다큐멘타리 ‘내 고향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1995년 8월15일 광복절 50주년 특집으로 제작한 적이 있다. 당시 LA타임스 기자로 일했던 그녀를 취재하면서 매일처럼 취재한 자료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질서정연하게 보관하는 자세, 정신대 문제를 파고드는 치열한 역사의식과 끈질긴 기자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말(言)이 곧 자기(己)가 되는 이들이 기자(記者)라고 한다. 자신과 사회의 목소리가 제대로 올바르게 전파되고, 울려퍼지고 사람의 가슴과 머리를 움직여 행동과 실천의 나침반이 되게 하는 일을 하는 이들이 기자인데 그 일을 정말로 제대로 하고 있는 지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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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률 특집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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