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며 시간을 재촉하는 사이 퇴근길 차량은 길게 꼬리를 물었다. 무슨 연유인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목적지를 한 블럭쯤 남기고, 차에서 내려 발걸음을 옮긴다. 예상과는 다른 한산한 공연장 입구. 뒤쪽부터 비어있는 자리들을 지나니 앞쪽에 한 무리의 관객들이 보였다. 그들은 한국의 위안부에 관한 역사를 처음 접하고, 외국 학교에서 한국과 아시아 문화와 역사를 올바로 가르키고자 찾아온 캐나다의 역사교육 선생님들이었다. 그날의 공연은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스토리텔러가 그들의 언어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흥부가’ 였다. 판소리 공연에서 소리꾼이 판소리를 들려주듯, 스토리텔링 공연에서는 스토리텔러가 고수의 장단에 맞춰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윽고 스토리텔러가 북을 든 고수와 함께 무대에 섰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를 알고자 찾은 외국인들 속에 공연장의 비어진 많은 좌석들. 여러 상념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들이 거인이라면, 아니 내가 거인이었다면 이 공연장이 꽉 메워졌을텐데’. 마치 비어진 그 자리가 사람들에게 소외된 우리문화의 자리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려는 순간, 유쾌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얼씨구!’ 관객들은 ‘얼씨구’를 외치고 다음은 ‘좋다!’를 외쳤다. 그들은 스토리텔러와 함께 장단을 맞추며 한국어로 추임새를 따라했다. 한국의 스토리텔러인 그녀에게 자신의 공연장에 온 관객이 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그곳을 찾은 관객 한명 한명에게 다가가 그들이 처음 접하는 한국의 문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들의 가슴에 한국 문화에 대한 씨앗을 심어주는 것, 더 나아가서는 구전되던 이야기를 모아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주며 위로를 전하는 것. 왜였을까? 난 그것이 스토리텔링의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은 거인들의 웃음소리가 비워진 자리들에 작은 씨앗으로 빼곡히 내리앉았던 날.
그로부터 일곱해가 지났다. 세상속에 한국의 문화를 알리며 스토리텔러로 꾸준히 성장해온 그녀가 지난달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멘로파크 라이브러리에서 열린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에 한국인 스토리텔러로 초청되어 공연을 펼쳤고, 이제 그곳에 빈자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스토리텔러 ‘김승아’. 그녀는 한국을 넘어 캐나다, 미국, 동남아와 오세아니아, 유럽을 비롯 중동의 이란과 아랍에미레이트, 아프리카의 케냐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와 설화, 우화 등을 다양한 예술장르와 접목하여 세계에 알리고 있다. 이 날 공연은 한국의 전통 설화인 ‘바리데기 공주' 이야기를 외국인들이 알기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 준 공연이었다. 한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바리데기 공주’ 이야기는 관북지방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로 불교와 서사무가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의 전통적 세계관, 죽음 이후의 후세관이 잘 나타나 있는 이야기다. 바리데기는 ‘버려진 아기'라는 뜻을 갖고 있다. 설화 속 바리데기 공주는 불라국의 일곱번째 공주로 태어났지만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이후 자라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아 효를 행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버려진 아이의 이야기는 비단 설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어쩌면 계산대로 살아야 호구가 되지 않을 것 같은 각박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버린 이를 위해 희생하는 바리데기를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게될까? 바리데기 공주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세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의 이야기와 막내딸인 코딜리아를 떠올렸다. 바리데기 공주의 아버지인 오구대왕과 같이 리어왕도 코딜리아를 매몰차게 내쫓지 않았던가? 또한 바리데기 공주와 같이 코딜리아 또한 목숨을 걸고 아버지를 지키려하지 않았던가?
국가와 민족, 시대를 달리하는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한국의 바리데기 공주의 설화에서도 리어왕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며, 문화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며 존중하게 되고, 더 나아가 사람들 가슴안에 숨은 아픔을 나누며 서로를 보듬어안게 하기도 한다. 스토리텔링은 이렇게 듣는 이들로 하여금 그 깊이에 따라 치유의 선물이 되기도 한다.
올해로 한국에서도 제 2회 국제 스토리텔링 페스티벌이 서울과 경기, 경주에서 열렸고 국제 스토리텔러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을 하였다. 그들의 한국에서의 경험들은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의 문화를 알리는 일은 그 옛날 일제 강점기에 개인 소유 재산을 털어 강탈당한 우리 문화재들 속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비롯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과 고려청자 등 수많은 우리 문화재를 지키던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문화 사랑을 떠울리게 한다. 시대와 역활이 달라졌을뿐 문화 속에 살아 있는 정신과 혼을 지키고 계승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K-POP과 한강의 기적으로 주로 인식되어 있지만, 오천년 역사를 갖은 한국이 지키고 계승하여 세계속으로 나갈 수 있는 문화는 그보다 넓고 다양하다. 비단 스토리텔링 뿐만 아니라 서양작곡가가 그들의 작품에 국악기 연주를 포함하고, 국악을 작곡,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등, 많은 예술가들이 문화적 장르를 넘나들며 복합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누군가는 지치고 힘겨운 길이라고 포기하거나, 크게 관심 갖아주지 않았던 길이었지만 그 길이 좋아서 사명을 갖고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이 시대의 간송이며 내일의 문화유산이자 개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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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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