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The Ultimate)’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궁극이란 기독교용어로는 ‘구원’이며 불교용어로는 ‘열반’의 경지를 말한다. 어긋남과 뒤틀림이 전혀 없는 ‘지고의 선(善)’으로서, 시간적으로는 구원성취의 순간이요, 장소 차원에서는 구원의 장소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언젠가 어느 교수가 신문의 한 칼럼에서 이에 수식을 더해 ‘미지의 궁극(the Unknown Ultimat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걸 기억한다. 신비감까지 느껴져 멋지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의 현실적 존재여부를 따지기 시작하면 그의 그 말에는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질문들과 함께.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함부로 그것을 ‘궁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게 만약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거라면, 그런 미지의 구원세계를 찾아 나서는 노력에 굳이 우리의 에너지를 쏟아 부을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등장하는 가장 인기 있는 답은 “추구 자체가 미덕”이라는 말이다. 가봤는데 없더라? 꼭 있어야만 하는가? 아니다. 없어도 좋다. 그냥 그 미지의 궁극을 찾아나서는 것 자체로 삶의 의미는 충분하다, 이런 식의 답인 것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그 궁극이 이런 거라면 난 그 길을 안 갈 것 같다.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확신 없는 일에 내 인생을 소진하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 사는 인생 잘 살고 싶다. 그러려면 미래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이 궁극을 ‘로고스’로 설명한다. 요한복음 1장에 잘 설명되어있다. 한국어성경으로는 ‘말씀’으로 번역되어있는데 원어로는 ‘로고스’다. 로고스는 원래 헬라철학 용어다. 어느 민족과 문화권이든 그들을 하나로 엮는 공통적 ‘개념’ 같은 게 존재한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한(恨)’이나 ‘정(情)’이 그런 것이다. 이를 영어로 바꾸려고 해도 너무 어려워 영어권은 이를 아예 ‘han’과 ‘jung’ 그대로 쓴다. 이처럼 당시 헬라문화권 사람들은 ‘로고스’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인지 다 알고 있었다. 어떤 ‘궁극의 경지’이자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절대선’ 같은 게 바로 이 로고스다. 그런데 그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 중대사실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 로고스 성취의 소식이라면 복음은 ‘자기선포적’인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진리는 스스로 자기의 진리 됨을 온 천하에 드러낸다. 빛이 어둠 속으로 등장하면 어둠은 퇴각한다. 빛의 ‘자기발현’적 특성 때문이다. 터져 나오는 샘물을 우리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을 알려면 그 궁극의 세계가 자기를 계시할 때뿐이다. 우리의 무지한 지식의 힘으로 그 자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런 말을 남겼다. “진리는 하나의 ‘덫’으로 걸려들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진리는 내가 붙잡은 방식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진리가 나를 붙잡는 방식으로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진리를 아는 것은 진리에게 자신이 알려지는 것이다.”
대단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진리)이 온 세상을 덮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진리가 나를 삼키고, 진리가 온 세상을 덮어버리는 날에 대한 비전을 꿈꾼다는 얘기다. 기독교신앙은 우리의 ‘거듭남(born again)’을 중시한다. 거듭남의 다른 말이 무엇일까? 칼럼 제목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를 선택하는 순간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게 아니라 그의 은혜가 나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은 ‘선택 받은 선택’이다.
이 칼럼이 나가는 날이 마침 한국의 ‘개천절’이다. 단군이 하늘을 우리 민족에게 열어준 날이라고 해서 개천절이다. 어릴 땐 이 날 학교 안 가서 좋았지만 다 큰 지금은 이 주제를 정말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단군이 하늘을 열어줬을까? 그것도 우리 한민족에게만? 궁극은 미지의 상태로 남지 않는다. 그게 진짜 궁극이라면 우리에게 반드시 알려진다. 진짜 개천절은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하늘을 열고 우리에게 오신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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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숭 목사 /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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