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삶은 한 마디로 빚진 자의 삶이었다. 그는 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심지어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한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의 고백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 그래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않으려고 오랜 기간 푼푼이 모은 돈을 모아 작은 집을 장만한 목사도 있지만,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남에게 빚을 지지 않고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간혹 주위에는 이러한 필연적 사실을 망각하고, 모든 성취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본인도 돌이켜 보면 가족을 위시해, 친구들, 주위 사람들의 무수한 도움을 받고 지금에 이르렀다. 고교때로 기억되는데, 막연하나마 나의 삶이 도움을 받기 보다는 도움을 주는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훨씬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았던 것을 인정하게 된다. 동족상잔의 처참한 전쟁 후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넉넉치 못한 살림에 본인은 가지고 싶은 것은 꼭 가져야만 하는 욕심많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 철부지었다. 맨 위로 형님, 그리고 네명의 누님, 본인과 남동생이 있었는데, 나는 유난히 사랑을 많이 받고 특별 대우를 받고 자라난 것이 철들은 후에야 깨달아지고,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빚을 진 일을 생각하면 특별히 잊혀지지 않고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대학 재학시 어머님께 일찍이 치매가 와서 가정일을 맡아 하는 도우미가 있었는데, 그분이 일을 그만 두니 다시 새로운 분이 올 때 까지 학교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매식을 할 형편도 못 될 때, 이 사정을 잘 아는 학교 친구가 도시락을 두개씩 싸 온 적이 있다. 그 후에도 그 친구에게 이모저모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그래서 만난지 50년 이상이 지났어도 그 끈끈한 우정을 지금까지 아주 가깝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일생에 가장 빚을 지은 사람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아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서 돈도 없고, 영어도 딸리는 본인이 학위 공부를 위해 대학원을 다닐때 아내가 보여준 희생과 인내와 격려,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은 나를 이끌어준 견인차가 되어 주었고, 그래서 그 빚을 잊으면 안된다고 늘 스스로 다짐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즘 읽은 이재서 박사의 ‘내게 남은 1%의 가치’란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이 분은 15세때 완전히 실명한 시각장애인이 되어, 일년을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죽을 궁리만 했다는데, 여의도 광장의 빌리 그래함 목사의 집회에서 복음을 듣고 인생의 대 반전을 이룬 분이다.

신학대학 재학시 본인 같은 장애우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려는 비전을 품고 1979년에 세계의 장애우들을 위해 요한복음 12:24절 말씀에 근거해 “밀알 선교단”을 창단하게 된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세계 22개국 70개 지역에 밀알 지부가 세워지는 누구도 예상못한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다.

그뿐 아니라, 장애우를 바로 섬기기 위해서는 사회사업에 관한 공부가 절실하다고 느껴, 가난한 시각장애인으로 혈혈단신 미국에 건너와 한국에서 시각장애인으로는 네번째로 박사학위(사회사업 전공)를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물론 첫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는 것을 잊지 않겠지만, 그 다음에는 부인의 눈물 겨운 희생,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분의 부인에 대한 고마움은 “본인의 박사학위증을 둘로 나누어 반쪽은 아내에게 주고 싶다”란 말로 표현했고, 학위를 받으러 단상에 오를때는 부인도 똑같이 박사 가운을 입고 올랐다 한다. 부인에게 말 할 수 없는 빚을 진 이 분의 심정이 고스란히 내 가슴에도 와 닿는다. 이분은 학위 취득 후 계속 정진하여 학생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신학대학인 총신대학에서 오랜 교수 생활을 하다가, 급기야는 올 봄에 총장으로 임명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부인을 비롯해 수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희생, 헌신으로 이 모든것이 가능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이재서 총장은 점자 노트로 65페이지나 되는 소위 ‘은인 노트’에 도와준 분들의 이름, 날짜, 후원 내역을 자세히 적어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고 하니, 이 노트는 많은 분들에게 빚진 자로서 겸손한 태도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깊은 메세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박찬효 약물학 박사,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