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내 고립주의 부활 움직임에, 70년 지속 브레튼우즈체제 흔들
▶ 통상전쟁·방위비 분담 압박 가중, 각자도생 시대 우리도 준비할 때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10개월가량 앞두고 있던 1944년 7월1일. 세계 44개국 대표 700여명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 집결했다. 전후 세계질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미국은 앞으로 세계가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2차 대전에서 미국의 역할을 잘 알고 있던 각국 대표단은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국제체제의 밑그림이 제시될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제안은 뜻밖이었다.
미국은 자국이 전적으로 비용을 부담하고 모든 해상무역을 보호하는 한편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시장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자유무역 질서인 ‘브레턴우즈 체제’다. 이 덕분에 전후 유럽은 다시 우뚝 섰고 일본과 한국에서는 경제 기적이 일어났다. 중국도 이에 힘입어 세계 무대의 일원으로 등장했다.
70여년간 세계에 번영을 가져온 이 브레턴우즈 체제가 최근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이 그동안 맡아왔던 국제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내려놓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자유무역과 안전보장이라는 두 축이 삐걱거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이후 심해지고 있는 통상전쟁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각국에 시장을 개방했던 미국은 이제 자국 내 일자리 창출을 위해 관세장벽을 높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통상전쟁을 하는 가운데 유럽과 일본·한국 등 동맹국에도 압박의 고삐를 조이고 있다. 미국은 심지어 철강과 자동차 수입이 자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보복관세 카드를 꺼내고 있다. 요즘 미국의 움직임을 보노라면 과거 자유무역 확산을 위해 각국에 세계화 압력을 넣던 그 나라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2 사정은 안보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 역할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 이는 트럼프 정부에서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조지 W 부시 정부에서 아프리카 등에서 미군을 감축하려는 계획이 입안됐고 버락 오바마 정부를 거쳐 트럼프 정부에서 가속화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 말 시리아에서의 일방적인 철군 발표에서 보듯이 미국은 해외에서 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과 일본·한국을 상대로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력을 넣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의 안보 발 빼기로 인해 곤혹스러운 것은 서방국가들이다. 미국이 빠지면 안보 불확실성이 너무 커진다.
지난 2월16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에게 “국제질서가 산산조각났다”며 직격탄을 날렸을 정도다. 물론 미국이 지금 당장 세계에서 발을 완전히 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냉전 시기처럼 미국이 세계의 안보에 전면적으로 개입하던 시기는 지났다.
미국이 고립주의 쪽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은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얻는 전략적 이득보다는 체제 유지비용이 더 크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만 하더라도 미국은 지난해 4,192억달러에 달하는 무역적자를 기록했지만 중국은 이를 고마워하기는커녕 일대일로(一帶一路) 등을 내세워 미국을 넘어서려 한다. 가뜩이나 일자리 사정이 좋지 않은 미국으로서는 중국의 도전이 달가울 리가 없다. 미국이 고립주의 행보를 하는 또 다른 배경에는 셰일 혁명이 있다. 셰일 혁명 덕분에 미국은 에너지를 자급할 수 있게 됐다. 과거처럼 중동산 석유 수송로를 지키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군함을 파견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자연히 세계 무역로 보호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 덕분에 한국은 광복 이후 지금까지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미국의 안보 우산과 자유무역시스템 덕분에 가능했다. 이제 그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은 경제는 물론이고 안보에서도 각자도생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다.
지금까지는 별 걱정 없이 중동 등으로부터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상당한 비용을 추가로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무질서의 시대를 맞아 우리는 과연 무엇을 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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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수 서울경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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