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여러분의 학자금 빚을 모두 갚아주겠습니다” - 초청연사의 한마디에 한낮의 더위와 피곤에 지쳐있던 졸업식장은 순식간에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다. 믿기지 않는 행운에 입을 다물지 못한 학생들은 서로를 얼싸안았고 장내는 기쁨의 환성과 감사의 박수로 가득 찼다.
억만장자 기업가 로버트 F. 스미스가 지난 일요일, 애틀랜타의 유서 깊은 흑인대학 모어하우스 칼리지 2019년 졸업식에서 396명 졸업생들에게 4,000만 달러의 깜짝 졸업 선물을 안겨준 것이다. 적게는 1만 달러부터 많게는 10여만 달러의 학자금 빚을 지고 있던 300여명 학생들이 무거운 빚더미를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게 해준 그 선물은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들에게도 꿈같은 ‘기적’이었다.
비슷한 ‘기적’은 38년 전 뉴욕의 한 졸업식장에서도 목격되었다.
1981년 6월 백만장자 기업가 유진 랭은 빈민가 할렘의 한 초등학교 졸업식 연사로 초청받았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50년 전 이 초등학교에 다녔던 그는 강단에 선 순간 자신이 준비해온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축사가 이 불우한 아이들에게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이 졸업생들의 4분의 3은 고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할 것”이라는 교장의 말을 생각하며 그는 축사의 내용을 바꾸었다.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내겐 꿈이 있습니다” 연설에 대해 들려준 그는 모두가 꿈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여러분이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다면 내가 여러분 모두의 대학 학비를 댈 것입니다” 놀라운 ‘졸업 선물’에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 나와 그를 에워쌌다.
그날의 61명 졸업생 중 90% 이상이 고교를 졸업했고 60%가 대학에 진학했으며 가난한 불모의 땅에 꿈을 심어주는 랭의 장학사업은 열렬한 호응을 받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지금까지 1만8,000여명 아이들에게 대학진학의 꿈을 실현시켜주었다.
모어하우스 졸업생들에 대한 스미스의 기적 같은 약속을 데이빗 토머스 학장은 ‘해방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졸업 후 6개월부터 당장 시작돼 10여년 넘게 계속될 빚 갚기에서 벗어났으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 꿈꾸었던 삶을 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해방감’을 남가주 캄튼 출신의 드와이트 루이스만큼 실감하는 졸업생도 드물 것이다. 한때 홈리스였던 그는 모어하우스에 입학했으나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힘든 생활이었고 학자금 대출로 버티어왔다. 그런데, 그의 일상을 무겁게 짓누르던 15만 달러의 빚더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세상엔 내 자리도 있다는 느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그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스미스가 졸업생들에게 당부했던 ‘선행 베풀기’는 이렇게 지켜지며 확산될 것이다.
스미스의 졸업 선물은 선행의 확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가 ‘빚 갚아주기’를 선물로 택했을 만큼, 그 선물이 감사와 놀람과 부러움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큼, 학자금 빚이 개인을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을 대변해주고 있어서다.
학자금 부채의 규모는 엄청나다. 약 4,500만명이 1.5조 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 자동차론이나 크레딧카드 빚보다 많은 액수다. 2016년의 경우 1인당 평균 3만301달러의 빚을 안고 대학을 졸업했으며 학부모들 역시 평균 3만3,291달러의 학자금 빚을 지고 있다.
이젠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중산층 진입도 힘들어질 만큼 대학졸업장은 안정된 삶의 필수조건이 되었는데 학비는 무섭게 치솟고 정부 보조는 줄어드니 학자금 빚이 불어날 수밖에 없다.(뉴욕타임스에 의하면 지난 25년간 등록금은 평균 85% 인상된 반면 각 주의 교육비는 인플레 감안해 학생 1인당 5% 감소했다)
주거비 급등에 기본생활 꾸려가기도 힘든 사회초년생에겐 취직을 해도 빚 갚기가 쉽지 않다. 학자금 빚 상환을 제때 못하면 크레딧이 타격 받을 것이고, 크레딧 불량은 그들의 생활 전체에 영향을 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국가 경제성장에도 중대한 위험이 될 수 있다”고 제롬 파월 연준의장도 경고한다. 정부의 대책이 시급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부에겐 해결 의지도, 해결 능력도 없어 보이는 것 또한 답답한 현실이다. 최고 부유층 증세로 재원을 마련하자는 엘리자베스 워런을 비롯 2020년 민주당 대선주자 일부가 학자금 빚 해결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양극화 정국에서의 실현 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번 스미스의 선물은 수천만명의 학자금 ‘채무자’ 중 300여명에게 그 자신의 표현대로 “버스에 연료를 조금 넣어주려는 것”이다. 학자금 빚 위기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재조명하고 대책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다.
스미스의 기부도 유진 랭의 약속 못지않게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상위 1%의 다른 부자들도 4천만 달러 깜짝 선물에 감동받았기를, 그래서 ‘꿈을 심는 사람들’의 기적이 물결처럼 퍼져나가기를, 수백명을 넘어 수천만 졸업생 모두가 빚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근본 대책이 마련되기를…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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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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