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첫 기억은 봄비의 애잔함이다. 십수년 전, 난생 처음 파리 역에 내린 밤엔 가랑비가 뿌렸다. 파스텔화 같던 옛 프랑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잔상 때문일까? 분주히 빗속을 걷는 파리장들 틈에서 우수어린 카트리느 드뇌브의 노란 우산을 찾았었다.
누군가 에펠탑이 파리의 깃발이라면,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의 역사라고 했다. 첫 아침, 노트르담으로 향했다. 성당은 도심에서 멀지 않았다. 메트로 4번을 타고 시테 섬에서 내렸다. 시테는 세느 강에 배처럼 떠있는 작은 섬. 옛 켈트 족이 이 자연 요새에 처음 부락을 이룬 것이 파리의 시초라고 했다. 그 후 수많은 침략에도 굳게 견뎌온 파리 시는 문장(文章)을 강과 배로 정했다. 흔들리기는 하나 가라앉지 않는다는 상징으로..
시테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자 눈앞에 대 사원이 금새 나를 압도한다.꿈에도 그리던 노트르담을 너무 쉽게 만남이 오히려 당황스럽다. 나는 정말이지 이 웅대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경건한 마음으로 만날 참이었다. 수 없이 사진으로 보고 머리 속에 그려온 성전. 800여년 전에 세워진 이 성스러운 하나님의 집을 나는 옛 솔로몬 성전을 대하 듯 격식을 차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트르담은 아무 가식없이 나를 맞았다. 보수공사를 위한 천막을 허리춤에 얼기설기 두른 채 빗속에 수수하게 서 있었다. 오히려 나는 예배자의 경건함도 못 갖춘 과객인 주제에 애써 민낯을 감추려 한 허식이요, 껍데기였다.
나는 대성당 바깥을 맴돌았다. 노트르담은 12세기 대표적인 고딕 건축물로 바티칸 성전보다 350년이나 앞선다고 했다. 사원은 그 옛날 무거운 돌로만 지어졌음에도 탑 높이가 70m나 되었다. 그리고 화려한 장미 채색창들을 통해 성전 안은 하늘 빛으로 가득했다. 석조 건물임에도 철골같이 견고한 것은 옛 건축술의 천재성 때문이라고 했다. 벽날개(flying buttress)란 예술적이고 기능적인 버팀돌벽으로 높은 사원 벽을 지탱해 준 것이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90m 첨탑 위에는 청동 수탉이 서 있었다. 왜 하필 수탉일까? 물어보니 프랑스 혁명 때부터 새벽을 깨우는 경각심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부활절을 앞둔 지난 주, 노트르담 사원이 갑자기 불길에 휩싸였다. 하늘아래 영원한 것이 없다지만 충격을 금할 수 없다. 석조를 받치는 내부 목재구조물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이다. 불과 한시간 만에 지붕과 첨탑이 힘없이 무너졌다. 나는 생중계에서 짚단처럼 쓰러지는 첨탑 꼭대기에 매달린 청동 수탉을 똑똑히 보았다. 순간 수탉이 하늘로 날아가길 기도했다.
그러나 다음 날, 청동 수탉은 잿더미속에서 녹지않고 발견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베드로가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던 그 새벽을 깨우던 수탉의 울음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사람들은 청동 수탉을 보고 “영성을 깨우는 피뢰침”의 부활이라고 썼다.
타오르는 노트르담은 신뢰가 무너지고 분열이 난무하는 현세에 영성을 일깨우는 하늘의 경고인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을 불태우면서까지 죄성으로 가득한 인간들을 돌이키시려는 하늘의 사랑일 것이다. 화재 후, 온 세계인들은 비로소 손을 잡고 성당의 재건축을 다짐하고 있다.
노트르담의 정면에 선 중후한 쌍탑도 살아남았다. 꼽추 콰지모도가 혼신을 다해 지키던 종탑이다. 그는 아름다운 집시, 에스메랄다를 사랑했다. 자신을 불사르는 헌신이었다. 그러나 권력가 프렐로는 경건의 탈을 쓴 위선의 화신. 집시들을 정죄하고 처형의 명을 내리면서 내심그녀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감추고있다. 남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죽이는 자와 자기 사욕을 위해 남을 죽이는 자의 드라마가 노트르담 종탑의 그림자 속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콰지모도와 프렐로 양극을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문호 ‘빅토르 휴고’는 인간적인 연약함은 오히려 우리의 영성을 일깨운다고 말한다. 인간의 양심을 굴절시키는 권력욕을 경계하고, 몸의 불구 보다 정신적 불구를 더 두려워하라고 경고한다. 그래서 노트르담의 진짜 꼽추는 콰지모도가 아니고 교만한 자들의 위선 임을 설파하고 있다.
불구덩이 속에서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온 노트르담의 수탉과 콰지모도의 종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세속에 무뎌진 양심과 싸늘하게 식은 영성을 회복시키시려는 부활절 새벽을 깨우는 하늘의 울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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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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