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용의 민주화운동 비망록7
▶ 별들의 이반고 메릴랜드대 ‘김지하의 밤’
1975년 10월 메릴랜드 대에서 유학생들이 주최한 ‘김지하의 밤’ 행사가 열리고 있다.
정기용 자유광장 대표의 회고록을 연재한다. 그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한 6.3사태를 계기로 한국 현대사에 새겨진 길고 긴 저항의 산맥을 종주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갈구한 시대에서 그는 화려한 주역은 아니었지만 번민하는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충실한 투사였다. 따라서 그의 회고는 온전한 개인사라기보다 주관적인 대한민국의 현대사이며 미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덧붙여 그가 산수(傘壽)의 세월 동안 주유(周遊)해온 애주와 명사들과의 교유의 흥미로운 기록이다.
-최홍희 장군과 이용운 전 해군참모총장
박 정권을 지탱하던 군심(軍心)도 이반되고 있었다. 육사 3기인 최홍희(崔泓熙)는 최덕신과 호형호제한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사석에서는 최덕신을 깍듯이 형님으로 대했다.
최홍희는 논산 훈련소장을 지내다 1962년 예편해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냈다. 66년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하는 등 태권도계에 큰 선구적 족적을 남겼다. 박정희와 불화를 겪다 197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함경도 출신인 그는 북한도 여러 차례 방문해 태권도를 보급했고 친북활동도 했다.
한민통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용운은 이승만 정부 말기인 1959년 4대 해군 참모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5.16군사정변 이후 구속됐다 망명한 그는 LA에서 거주했는데 첫째 부인은 워싱턴 지역에서 살았다. 그는 일본의 언론인들을 만나 북침설을 주장해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부패 군인으로 낙인 찍혀 있었고 북한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것으로 전해져온다.
그의 친동생 이용문(李龍文) 장군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육본 정보국장 재임 시 남로당에 연루돼 군복을 벗은 박정희가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이용문이 작전교육국장을 할 때 박정희가 차장으로 보좌했으며 박이 존경한 유일한 선배군인이었다 한다.
그 인연 때문에 이용문 장군의 아들 이건개는 30대 젊은 나이로 서울지검장과 치안국장,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파격적인 혜택을 받기도 했다. 그러니 박정희의 이용운에 대한 배신감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석남 장군과 ‘구국향군’ 조직
역시 한민통에서 활동한 최석남 전 육군 통신감은 박정희와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2기 동기생이다. 뉴욕에서 살던 그는 나를 만나면 박정희에 얽힌 일화들을 들려주었다. 최 장군은 특별한 역사, 문화적 안목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탁월한 이순신 장군 연구가이면서 골동품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1972년 뉴욕에서 ‘재미 구국향군’을 창설하는 등 군의 민주화에도 앞장섰다. 구국향군은 최 장군이 사령관, 부사령관은 전두환과 육사 11기 동기인 장석윤 전 예비역 중령, 참모장에 고세곤, 그리고 지역 책임자로 김장오 박사(보스턴), 최명상(시카고), 최장길(버지니아)로 조직을 갖추었는데 뉴욕의 유엔본부 앞에서 군 출신들로는 최초의 유신반대 시위를 벌였다. 또 회보도 발행하고 미 의회에 한국의 실정을 알리는 등 활동을 했다.
구국향군의 운영을 맡은 고세곤은 육사 15기로 소령으로 예편했으며 1969년 도미 후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시작으로 외길을 걸어온 민주투사다. 그의 형 고재곤은 워싱턴한인회장에도 출마했으며 질녀인 루시 고(고혜란)는 연방 지방법원 판사인데 얼마 전 삼성과 애플의 소송을 맡기도 했다. 막내인 고의곤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필자(왼쪽부터)가 이재정, 김응태 씨 부부와 함께 했다(왼쪽). 태권도의 국제화에 이바지한 최홍희 장군.
-뒤에서 도운 사람들
종교계와 군부 출신 인사들뿐만 아니었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행진에는 이름도 남기지 않은 숱한 미주 한인들이 참여했다. 70년대 중반, 워싱턴 한인사회에서 반 유신정권 기류는 점증했다. 한인단체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은 단체장들이 박 정권을 비판하는 게 당연시됐다.
민주화 대열에서 앞장선 이들도 있지만 뒤에서 도움을 준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싶어도 국내의 연고자가 걸리거나 여건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화 동지들을 응원하고 후원해주며 그 길에 동참했다.
볼티모어의 안봉근, 신필영, 한인회장을 지낸 정장훈, 그리고 영남향우회장을 지낸 서영해, 메릴랜드의 이용무, 서유웅, 정운익 씨 등이 기억난다.
조지 워싱턴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윤영오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훗날 윤영오는 국민대 정치대학원장과 한국 국제정치학회장을 지냈다. 재무부 관료를 하다 1970년대 말 유학 온 이헌재는 DC의 듀퐁 서클 인근에 일시 거주했다. 그는 경제에 관해 자문과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진의종 전 총리의 사위인 이헌재는 훗날 경제부총리를 역임했다.
-김응태와 ‘희망의 소리’ 방송
유신정권은 민주화세력의 숨통을 끊으려 들었다. 어떤 체제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도합 아홉 차례나 발동한 무법적 긴급조치는 전가의 보도였다. 한국민들은 그 어떤 진실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언론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김응태 씨가 ‘희망의 소리’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건 1975년이었다. WFHS 방송국으로부터 매주 일요일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시간을 빌렸다. 한 시간짜리 방송이지만 한국 소식을 전하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윤보선 전 대통령과 전화로 인터뷰해 방송에 내보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방송을 총 지휘한 인물은 이근팔 씨였으며 아나운서는 김응태와 그의 부인 이재정이 맡았다. 김응태는 80년대 초반, DJ가 2차 망명을 했을 때 각별한 인연을 맺었으며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 워싱턴 평통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재정은 1971년 문화방송에서 인기를 끌었던 ‘왈순 아지매’의 히로인이다.
나는 시사해설, 그리고 영어 방송은 강영채 씨가 진행했다. 강영채 씨는 미국의 대학에서 강의하다 나중에 갤러리를 운영한 사람이다. 특히 KBS 아나운서 출신인 김영호 씨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광재 아나운서와 장성남
용산고를 나온 김응태는 언변도 좋지만 재정적으로도 안정돼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밥도 잘 샀다. 당시 그는 부인과 알링턴 인근에서 ‘왈순 아지매’란 식품점을 운영했다. 이재정이 여주인공을 맡았던 연속극 제목을 따온 상호였다. 이 부부는 풍자극도 만들었는데 꽤 재미가 있었다.
그 무렵, KBS에서 이름을 날렸던 이광재 아나운서가 같은 방송국에서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11시에 방송을 했다. 친 정부 성향이었는데 ‘희망의 소리’와 묘한 대비가 됐다. 두 방송 모두 방송 전후에 애국가를 틀다 보니 청취자들은 일요일 아침에 네 번의 애국가를 들어야 하는 일도 있었다. ‘희망의 소리’ 방송은 1년3개월 간 운영됐다.
시대의 밀폐된 공기를 깨우는 것은 언론이었다. 내가 ‘한민신보’를 통해 민주화운동을 하듯 장성남도 ‘자유공화국’을 통해 진실을 알리려 했다. 그러다 재정상황이 여의치 않아 13회 발행 후 폐간됐다. 그는 바짝 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경우도 밝았고 리더십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마흔 한 살의 나이에 위암에 걸려 알링턴 병원에서 타계했다.
-메릴랜드대서 김지하의 진오귀 굿 공연
1975년 10월11일, 워싱턴 지역의 유학생들은 메릴랜드 대에서 ‘김지하의 밤’을 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된 김지하 구명운동이 국내외에서 활발할 때다.
엄한섭, 이무종, 김광수, 오석환, 이성식, 최부일 등 유학생들과 고의곤 등은 행사를 알리기 위해 김지하의 ‘양심선언’ 등 그의 작품을 복사해 3천부나 우편으로 배부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김지하가 1973년에 쓴 희곡 ‘진오귀 굿’ 공연이었다. 농촌 계몽을 위해 전통 마당극에 저항의 정신을 입힌 작품이다. 공연을 위해서는 배우들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난항을 겪었다. 출연을 응낙했다가는 이내 못하겠다고 그만 두곤 했다. 협박전화도 이어졌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공연은 개최됐다. 미 펜클럽 회장 뮤리엘 루키서와 인혁당 사건의 만행을 해외에 폭로하다 강제추방당한 제임스 시노트 신부도 참석해 힘을 보탰다.
압제에 숨죽인 민중은 공연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문화는 저항의 몸짓이었다. 날고 싶어 하는,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구와 외침은 결코 멈춰지지 않는다.
<
정리 이종국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