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진한 너희들은 태어난 그대로 아름다워"
▶ 음악·미술·요가 수업 5년째·한인가족 참여 소망
백연희 대표
40여년 화가로 인생을 산 그는 무엇에 마음을 움직여서 장애우 예술교육에 나섰을까. 장애우를 가족으로 두지 않고서는 쉽사리 자신의 가진 것을 내놓을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질문을 품고 그를 맞닥뜨렸다. 사실 몇해 전부터 그를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면서 거절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2013년부터 5년간 장애우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왔지만 참여한 한인가족은 단 1명뿐이라 아쉬웠기 때문이란다. 더 많은 한인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어렵게 용기를 냈다는 것이다.
봄비 맞은 봄꽃들이 피어오른 2월초 CHIM(Create Healing Inspiration & Mind) 봄학기가 개강했다. 몇개월만에 오클랜드 백연희 화가 스튜디오에 모인 장애우와 그 가족들은 교사들과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매주 토요일 12-24세 장애우들이 모이는 이곳은 누가 더 앞서려고 다투지 않고, 누구를 부러워하지 않고, 태어난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도록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며 북돋는, 따스한 햇살 같은 기운이 감돌았다.
백연희(73) CHIM 대표는 “좋은 사람들이 함께했다는 기억을 그들에게 남겨주고 싶다”면서 “그 기억이 인생을 밝혀주는 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 대표는 오클랜드의 성인 장애우 예술교육기관인 크레에이티브 그로스 아트센터(Creative Growth Art Center)에서 3년간 자원봉사를 하면서 “내 그림, 내 자식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남을 돌보자는 생각이 깊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3천스퀘어피트의 큰 공간인 화실과 아직은 괜찮은 기운이 남아 있어서 CHIM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서 “경험과 사명이 넘치는 박현지, 김혜령 선생 등이 합류하는 등 하늘이 좋은 사람들을 보내준 덕분”이라고 겸손해했다.
사실 백(정) 대표의 집안은 일찍부터 나눔을 실천해온 명문가이다. 할아버지 정찬유 장로는 황해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고, 아버지 정인욱 회장(강원산업주식회사)은 사업가로 성공하자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뜻을 받아 설립한 것이 바로 시각장애인 등 소외계층을 위해 복지서비스를 하는 ‘정인욱복지재단’이며, 현재 큰언니 정영자씨가 재단 이사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남은 자산을 CHIM에 기부할 계획인 백 대표는 “아버지 영향이 있지 않겠느냐”면서 “가정사 이야기는 그만하면 됐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지금까진 혼자 운영해왔지만 앞으로는 CHIM의 사명과 함께할 후원자도 필요하다”면서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만나면 나도 선량해지는 것 같다”고 웃음지었다.
서울대 미대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한 백 대표는 197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진 개인전을 시작으로 40여년 동안 서울, 샌프란시스코, 뉴욕을 오가며 40여회의 개인전과 수많은 그룹전을 개최해왔다.
작가활동 초반에 선보인 인물과 도형을 함께 다룬 추상작품, 건물과 빛을 소재로 한 표현주의 작품들, 그리고 최근에 천착한 주제인 하늘과 별, 우주와 건물의 평면도 등을 다룬 작품들까지 고르게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서울대학교 박물관, 호암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한국문화원, 산호세 미술관, 산타클라라 트라이튼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건축디자인 활동을 하다 은퇴한 계강식(73) CHIM 자원봉사자는 “백연희 대표가 장소 제공은 물론 교사 사례비 부담 등 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면서 “그 순수한 뜻이 좋고, 천진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보람되다”고 말했다.
몬트레이에서 매주 오클랜드로 달려오는 박현지 선생은 “처음 3년간은 거의 나 혼자 노래를 불렀지만 이제는 아이들과 같이 부른다”면서 “입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더딘 아이들은 그동안 맘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김혜령 선생은 “아이들이 내 작품에 영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면서 “다같이 대형작품을 해낼 때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고 전했다. CHIM은 봄과 가을 기금마련 전문음악인 초청 연주회와 장애우들이 그린 미술전시회를 열고 있다.
동생 조슈아(18)와 요가 수업을 받은 형 게리 라퀘크는 “동생이 이곳을 좋아한다”면서 “성인 장애우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데 CHIM이 그 역할을 해주고 있어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수잔 크레이도 “아이만 행복한 게 아니라 학부모들간에 수다가 쏟아지는 이곳이 나도 편안하고 좋다”면서 “모두 한가족처럼 지낸다”고 흐뭇해했다.
백 대표는 꽃과 나무, 물이 흐르는 개울과 돌탑, 조각석상 등이 어우러진 정원으로 안내했다. 그는 “아이들이 감정을 다스려야 할 때나 학부모들이 우울해 할 때 이 정원을 5-10분 걸어보라고 권유한다”면서 “마음을 달래주는 묘한 힘이 있는 이곳은 일종의 명상처”라고 말했다.
이날 CHIM 교사와 학생들은 3시간동안 발렌타인데이 카드 만들고, 요가를 하며, 싱어롱을 했다. 박현지 선생의 전자피아노와 앤드류 임 선생의 기타에 맞춰 마쉬멜로의 곡 ‘해피어(happier)’를 부르면서 ‘네가 더 행복해지길 바래(I Want you to be happier)’를 외치고, 콜드플레이의 명곡 ‘옐로우(Yellow)’를 부르면서 ‘내가 사랑하는 걸 너 아니(You know I love you so)’란 노랫말로 마음을 녹였다. 그 순간들을 각자 마음속에 특별한 기억으로 저장했다.
▲문의 김혜영 (808)265-4366, 계강식 (510)653-0674, chim.oakland@gmail.com, www.chimstudio.org
음악시간에 즐겁게 싱어롱을 하고 있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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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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