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시니어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메인주의 아케이다 국립공원을 다녀왔다. “이리 와서 두 줄로 쭈욱 서세요. 얼음! 자! 이제 카운트 하겠습니다” 대형버스로 공항으로 실려가 40여명이 한꺼번에 체크 인하면서 가이드의 명령에 따라 우리 일행은 초등학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질서정연하게 비행기를 타고 내리며, 화장실에 가는 것도 젊은 인솔자의 눈치를 살피고 다녔다.
“얼음”하면 발도 떼지 말고 그대로 서 있어야 한다. 자유스럽게만 여행하던 나에게 그 단어가 생소하고 어색했는데 시니어 단체여행의 안전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걸 바로 터득하게 되었다. 새삼 얼음이 주는 외연의 다양성을 느꼈다. Ice 라는 의미보다 freeze 라는 의미로 이해가 되었다. 어려서 얼음은 팥빙수며 소다에 넣고 여름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귀한 존재였다. 그 뿐이랴!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에서 얼음 위를 신나게 스케이트로 누비고 다니고 미국 와서 결혼 후에는 애들하고 스키를 타며 눈과 얼음을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삶이 생각만큼 순조롭게 진행이 안 될 때 그 상황을 얼음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정지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많은 시니어의 삶이 쇠약해가는 건강과 내일을 알 수 없는 생활에서 살-얼음을 딛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추운게 싫어지고 눈이 오는 날은 미끄러운 길이 무서워 웬만하면 운전을 안하고 집에 있게 된다. 인간의 나이는 절대 젊어질 수 없으니까 얼음이란 단어에서 시니어의 정지되어가는 삶이 보이는 것같아 서글픈 생각도 든다.
아케이다 공원이 속한 메인 주는 미국에서 12번째로 작은 주이고 인구도 9번째로 적다. 랍스터, 대구, 가재미등 어류와 가금류, 불루베리, 사과, 메이플 시럽 등의 농업과 종이산업이 발달한 주이다. 무엇보다 랍스터의 주라고 한만큼 랍스터가 많이 잡히고 휴가철엔 랍스터를 즐기러 미국 전역에서 관광객이 모인다한다. 우리의 점심 접시에도 와인과 함께 무럭무럭 김이 나는 크고 빨갛고, 싱싱하고 쫄기쫄깃한 랍스터에다 감자, 옥수수 등이 담겨졌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미국의 동쪽끝에 면해서인지 10월 말도 안됐는데 벌써 눈이 와서, 배를 타고 호수주위를 돌고 케딜락 마운틴에 올라가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공원 안은 버스를 타고 마음껏 다닐 수 있었다. 바다와 호수를 낀 산과의 어울림이 정말 멋진 한폭의 그림이었다. 석양이 물드는 하늘 끝에는 출렁이던 바다가 금빛으로 물들어 오고 어깨너머로 아련한 추억이 바람타고 넘실거린다. 그물에 걸려있던 나의 젊은 날이 풀려나와 가을 단풍에 곱게 물들여진 길 위에 오버럽 되어 눈시울도 빨간 단풍처럼 물들고 있다.
구르몽의 ‘낙엽’이란 시의 중간 귀절이 떠오른다. “해질 무렵 낙엽모양은 쓸쓸하다/ 비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제일 예쁜 은행잎과 떡갈나무, 단풍잎을 주워다가 책갈피에 정성껏 눕히고 재잘거리며 순진하게 낙엽 밟고 깔깔거리던 학창시절. 그 친구들도 이제는 가을을 밟고 있겠지… 밤 안개를 가르며 달리는 메인주의 밤은 비린 바다 내음을 풍기며 숙소로 향하고 있고 그물에서 뛰쳐나온 추억은 하얀 파도를 타며 유유히 바다위를 흐르고 있었다.
대서양을 접하고 수많은 섬들과 호수와 여러개의 산과 소나무 등 숲으로 덮인 아케이다 공원을 품은 바 하버(Bar Harbor)라는 도시의 조그만 어촌마을은 계절처럼 쓸쓸하지만, 넉넉하고 여유롭게 마음에 다가오는 건 내 마음이 가을을 닮아가기 때문일까? 관광으로 북적거리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도 시즌에 연연치 않는 마을, 배, 등대, 때를 알고 순응하며 다 내어주고 서 있는 나목을 보면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아케이다 국립공원의 50마일이 넘는 케리지 트레일(Carriage Trail)은 세계의 재벌 존 록펠러(John Rockefeller)에 의해 1933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이야기처럼 그 긴 길을 만들어 수많은 후손에게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만든 이름 ‘록펠러’. 그의 위대한 업적에 새삼 감사하지만, 이룬 것 없는 나 자신은 자꾸 왜소해진다. 돌이켜보면 난 주위의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아왔다. 이제는 시니어의 얼음을 깨고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고 베풀며, 마음을 열어서 적은 일이라도 남에게 힘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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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잔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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