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추석이 여느 해와 달리 좀 일렀다. 무더운 여름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중에 맞은 추석은 마치 오래 기다린 반가운 친구가 만찬 준비가 덜 된 중에 들어서는 듯했다. 미국에 와서 한동안은 추석이 가까이 오면 주위의 친지에게 그날은 꼭 달을 보라고 채근을 했다. 한 해 중 가장 둥글고, 가장 환하고 가장 노랗게 빛나는 큰 달이라고 마치 내가 달 전도사나 된 양 만나는 사람에게 빠짐없이 말하며 내 마음의 달을 한껏 키우며 둥글렸다.
남편에게 그날 밤은 체사픽크 만으로 달맞이하러 가자고 다짐을 했건만 남부를 강타한 태풍의 영향으로 올 추석에는 비가 왔고 결국 달을 못 보고 지나갔다. 문득 미국에 와서 한 달 만에 맞이했던 추석이 생각났다. 저녁을 마친 아버지는 느닷없이 “얘들아, 달맞이 가자.” 하셔서 어두운 밤에 온 가족이 집을 나섰다.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궁금해하는 우리를 미소로 바라보며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는 메릴랜드 대학교 캠퍼스 안으로 들어가셨다. 아직 워싱턴의 지리도 운전도 익숙지 않은 때 아버지는 언제 이 캠퍼스를 알아 두셨는지 텅 빈 캠퍼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셨다. 우리는 모두 왁자지껄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하늘에는 크고 노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미국에서 맞는 첫 한가위 보름달을 가족에게 보여주며 흐뭇해하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우리에게는 바로 환하고 푸근한 둥근달이었다. 평생 몸담아 일하던 교직을 오로지 가족들에게 좀 더 나은 삶을 기약하기 위해 퇴직하고 미국에 오신 아버지다.
언어와 풍습이 생소한 곳으로 가족을 이끌고 온 아버지의 막막한 심정이 고국 하늘에서 본 똑같은 달을 이곳에서 보며 안도하였을까. 미국에서도 교정은 아버지에게 친근한 곳이었으리라. 동생들과 나는 “아버지, 달을 보여 주시겠다는 곳이 바로 여기에요?” 하며 훤한 달빛아래 서로 그림자를 쫓아 뛰어다녔다. 천진한 때였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너나 할 것 없이 달이 뜨면 가끔 전화한다. 가까이 사는 자매들은 물론이지만 서부에 사는 남동생도 “누나, 달이 참 좋네.” 하며 그곳의 달을 사진 찍어 보낸다. 세상의 어느 곳이든, 맨해튼 빌딩 숲이든 오지의 섬마을이든 구석구석 공평하게 비치는 달, 문득 하늘을 보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기는 달, 그 달에 나는 늘 감탄한다.
달을 따라 내 한 달이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그 옛날 안동 벽지 용궁리의 외갓집에서 나를 보고 함빡 웃던 외할머니의 실눈 같은 초승달을 바라보며 새로운 한 달을 감지한다. 그 웃음과 같이 이번 달에는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꽃 몽우리가 부풀어 오르는 듯 봉긋해지는 상현달의 모습에 쿵쾅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지켜본다. 점점 커가는 달에 어둠이 밀려 나가듯 모난 삶에서 생긴 분노와 상처 그리고 자괴감이 차츰 사라짐을 느낀다. 어느새 달은 둥그럼의 절정을 환하게 이루고 움츠린 어깨를 펴라는 듯 빙그레 웃는다. 나는 그런 달이 그저 눈물겹고 반갑다.
산山 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성선 시인의 시 중에서 ‘별을 보며’가 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를 마음으로 뇌이며 내 너무 달을 쳐다보아 달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달을 그만 봐야지 하는 생각이 슬쩍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이 맑은 심성을 갖고 있지 않으니 달이 닳도록 보고 또 본다. 하이웨이를 운전하다가도 집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려 현관문을 열기까지 몇 발자국의 걸음 중에도 달을 쳐다본다. 때로는 키가 큰 나무에 가려 집에서 달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이 다니던 근처 학교에 간다. 사방이 탁 터인 운동장에서 말없이 달과 눈 맞춤을 하며 한밤중의 적막함을 오롯이 즐긴다. 나에게 달은 오랫동안 사귀어 온 곰삭은 친구와도 같다. 눈빛만으로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고 이해하는 친구처럼 달은 내 마음에 평안을 안겨준다. 어느새 다음 주로 다가온 구월 보름달을 기다린다. 어디로 달맞이 갈까. 달력에 다음 주 화요일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린다. 아버지의 그윽한 미소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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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워싱턴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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