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들의 아들, 손자가 올해 초등학생이 되었다. 1970년대, 미국땅에 유학 온 후 뿌리내리느라 정신없이 살았는데 어느 덧 자식들이 자식들을 낳았다. 이민 2세에서 3세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민 2세와 3세는 어떻게 다를까? 마커스 핸슨(Marcus Hansen)은 미국 이민자들의 역사와 생태를 평생 연구한 학자다. 그는 유럽 이민 가족의 2세로 이민 가정의 변천사를 추적하면서 2세와 3세대 간의 뚜렷한 차이를 발견했다. 즉, “2세들은 부모의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 그러나 3세들은 조부모의 뿌리를 다시 찾는다.”이 관찰은 핸슨의 법칙 (Hansen’s Law)으로 알려지고, 그의 논문은 1941년 풀리쳐 상을 받았다.
이 낯선 땅에서 2세들을 키워온 우리들은 이 말 뜻을 안다. 온갖 시행착오를 다 겪지 않았던가. 좀 놀라운 건 이민 세대는 동서양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대개 2세들은 영어를 못하는 1세 부모에 대한 열등감이 심하다. 짙은 액센트에 브로큰 잉글리쉬를 쓰는 1세 부모가 학교에 오면 조롱거리가 될까 봐 안절부절하던 경험을 가진 세대다. 특히 우리 2세들은 부모들이 먹는 김치나 된장찌개를 부끄러워하고 빨리 세련되고 미국화된 세대가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속은 희고 겉은 노란 바나나가 많은 것이 2세란 것이다.
한인 2세, 샌드라 오가 주연한 영화 ‘더블 해피니스 (Double happiness)’는 이런 동양계 2세의 갈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형적 가부장인 1세 아버지가 바라는 딸의 행복과, 서구화된 2세 딸이 느끼는 행복의 개념은 한글과 영어 만큼이나 다르다. 두개의 다른 문화권에 속한 1세 아버지의 바램과 2세 딸의 행복을 둘다 만족시켜줄 수 있는 ‘더블 해피니스’는 적어도 이 영화 속엔 존재하지 않는다. 백인 애인을 따라 떠나는 딸의 집 열쇠를 뺏으며 눈물짓는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을 2세들은 모른다.
그러나 3세는 다르다. 훨씬 뿌리 지향적이라고 한다. 이들은 오히려 너무 미국화된 바나나 2세 부모들에 반발한다. 왜 한국인인 내게 한국말도 안 가르쳤는가 되물으며 3세들은 다시 뿌리를 찾아 나선다. 비록 영어는 못했어도 밤낮으로 일하며 뿌리의 얼을 전수하려 했던 이민 1세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강인한 생존력에 존경감을 갖는다. 이차대전 때 일본인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보낸 미정부의 역사적인 과오를 법정에서 강하게 투쟁한 세대의 주축도 일본인 3세 변호사들이었다.
우리 가문의 3세,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한글 동화 한편을 읽어준다. 7살 난 그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열심히 듣는다.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사슴은 언제나 머리에 솟은 뿔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가늘고 홀쭉한 다리가 늘 불만이었다. 어느 날, 사슴은 뿔 달린 머리를 곧추세우고 숲을 거닐다가 갑자기 사자의 추격을 받는다. 황급히 도망가려는데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뛸 수가 없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아무리 빼내려 해도 뿔이 워낙 길고 가지가 많아 꼼짝도 않는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뒷다리로 힘껏 차니 뿔이 얽힌 나뭇가지가 뚝 부러진다. 사슴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초원을 날렵한 다리로 전력 질주한다. 마침내 사자를 따돌린 후 숨을 몰아 쉬며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뽐내던 뿔은 거의 나를 죽일 뻔 했는데, 평소 부끄럽게 생각했던 다리가 나를 살렸구나!"
우리 이민자들에게 뿔은 무엇일까? 겉으로 나타난 한국민의 우수성이거나 모범적 이민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결정적인 순간에 살리는 다리는 평소 눈에 보이지 않던 한국 이민의 뿌리 의식이라 믿는다. 강인한 실향민의 생존력이 우리를 살리는 사슴의 다리이다.
역사적으로 대이동을 경험한 민족이 강한 생존력을 보여왔다. 로마에 망한 후, 세계를 유랑한 유대인들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이라도 한 지역에 오래 안주한 그룹보다 계속 이동해 온 그룹들이 훨씬 생명력이 강하고 사회적 성취도도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와있다.
우리 한국인들도 그렇다. 6. 25 전쟁으로 고향을 등진 실향민들이 보여준 생존력, 미국에 와서 거의 맨손으로 큰 타운을 건설한 이민 1세. 억척같이 공부해 우수한 성적을 내는 2세와 3세, 이는 대이동을 경험한 한국 이민들이 곳곳에서 보여주는 저력이다.
그러나 4세, 5세대로 내려가면 어쩔 수없이 미국문화에 동화됨을 부인할 수 없다. 동화되면서도 아시아계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선 매 세대마다 훌륭한 롤 모델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도산 ‘안창호’선생이나, ‘김용’세계은행 총재, 그리고 수년 전, 미역사상 최초로 워싱턴 주지사로 당선된 중국계 3세 ‘개리 록’등은 훌륭한 롤 모델이다.
록 지사는 선거 때마다, 아시안의 약점을 들춰내는 상대방을 맞받아, 오늘의 미국 건설에 밑거름이 됐던 아시아계 이민들의 업적과 생존력을 당당하게 자랑하며 강한 뿌리 의식을 보였다. 그는 당선 후, “할아버지가 잡역부로 일하던 곳에서 불과 2마일 밖의 주지사 관저로 오기까지 무려 1백년이란 세월이 지났다”고 감격해 했다.
이번 선거에도 여러 한국계 후보자들이 나서고 있다. 차세대 롤 모델 감들이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아시안 이민이 거의 6배 늘었지만 아직도 투표율은 전체 1% 밖에 안된다. 동양계 영향력이 빈약한 주 원인이다. 트럼프 집권 후, 반이민 정서가 날로 팽배해지고 이민자 혐오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개인적 자랑이나 되는 ‘뿔’이 아니다. 이민 3세들이 다시 찾는 이민자들의 뿌리, 강인한 생존력, ‘사슴의 다리’를 가진 롤 모델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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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수필가, Enviro Engineering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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