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TC 1기 육군소위 시절 나는 대구 2군 사령부 정훈장교로 근무했다. 그때 대구의 시인 박양균, 신동집, 김춘수 선생님 등을 만날 수 있었다. 무랑루주 찻집이 우리들 만남의 공간이었다.
퇴근 후 내가 바로 무랑루주로 가서 그분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즐거운 특권이었다. “현대문학”으로 막 데뷔한 젊은 시인에게 그분들은 친절했다. 그리고 따뜻하셨다. 백조라는 찻집, 하이마트라는 음악실이 나의 응접실이 되기도 했다.
대구를 떠나면서 대구역 광장 바로 옆 경북 공보관에서 시화전을 열 수 있었던 것도 그분들에 대한 나의 인사였다.
2군 사령부 1년을 마치고 전방으로 떠나면서 가졌던 시화전에 “대구 시편” 외 20여 편에 그림이 그려진 전시에 서울에서 어머니가 내려오셔서 축하해 주셨고, 효성여대 전대웅 교수님이 대구의 일간지에 시평을 써 주셔서 고마웠다. 대구의 영남일보, 대구일보 문화면은 내 시편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주었다.
전방으로 가서 26사단 공병대에서 마지막 1년을 마쳤는데 처음으로 동두천 북쪽 도로를 질주하다 38선이라는 표시판을 보고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었고, 임진강의 갈대밭, 비무장지대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던 분단국의 비애가 나를 한동안 우울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비무장지대에서 지뢰를 밟고 죽어가던 사슴, 노루, 야생동물들의 비애를 함께 느끼고 살았다.
그때 쓴 「임진강」, 「비무장지대」가 국가재건 최고회의 월보에 게재되는 영광도 가졌다. 지뢰탐지도 공병대의 일이었고 겨울눈이 쌓이면 도로의 눈 치우는 일도 공병대의 일이었다. 나는 강설기 그때, 석탄이 타는 난로 옆에서 시를 읽고 쓰고 있었고, 거기서 쓴 시 한 편이 한국일보 1면에 게재된 적도 있어 병사들에게 미안했다.
군 복무 2년을 마치고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쓰고 한국을 떠나 지금까지 방랑이 계속되고 있다. 시간강사 급료로는 살 수 없었던 가난한 나라 청년은 미국유학으로 한국을 탈출해야만 했다. 가장 가난하고 작은 나라에서 가장 부유하고 광활한 나라를 찾아 나서고 싶었고, 시인에게 그것은 그냥 방랑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대학에서도 장학금을 주지 않았다. 이공계 친구들은 모두 장학금을 받고 떠나는데 인문 사회과학을 전공한 친구들은 입학허가만 나왔다. 그때 필리핀 국립대학에서 동남아 조약기구 장학생으로 나를 뽑아 마닐라로 향했다. 방랑은 거기서 시작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고갱이 타히티로 떠나듯 나는 마닐라로 떠났다. 그의 그림이 고혹적이듯, 아니면 서머셋 모움의 “달과 6펜스”가 인상적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필리핀 국립대학 행정대학원에서 1년을 공부하고 마닐라를 떠나며 마닐라 크로니클 주간지 Manila Chronicle Weekly에 총 6편의 시를 남겼다. 마닐라 크로니클 신문기자였던 친구가 나를 주필에게 소개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외국의 매체에 내가 쓴 영시를 발표할 수 있었다.
첫 번째 3편은 앞표지 뒷면에 게재했고 3, 4개월 후 두 번째 3편은 뒷표지에 삽화와 함께 게재했는데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행복을 찾아 나서다 폭풍우를 만나는 「나의 항해」라는 시와 마닐라 호세 리잘 공원에서 바라보는 밤바다 건너 카비테라는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며 쓴 「목탄화」와 「어머니께」라는 시가 발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를 사랑한 기자와 주필 덕분에 외신 기자 클럽에 나가 술을 마시고 플라멩고 춤을 추는 무희의 손에 이끌려 무대 위에 올라가 함께 춤을 춘 부끄러운 추억도 간직하고 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춤을 추지 못한다.
지금은 사라진 ‘미국 대통령’이란 여객선을 타고 마닐라를 떠나 홍콩, 일본 요코하마, 하와이 호놀룰루, 샌프란시스코에 닿는 항해는 요코하마에서 끝났다. 일본 지바에 살고 계셨던 당숙이 배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지바까지 오라고 말씀하셔서 나는 거기서 내렸다. 당숙은 내게 일주일 동안 도쿄와 그 일대를 구경하고 비행기 편으로 미국으로 가게 해주셨다.
최씨 집안의 장손으로 처음 미국유학길에 오르는 조카에게 그는 관대하게 베푸셨다. 하네다 공항 송영 탑에 서서 “홍이야, 성공해야 한다!”고 절규하던 당숙은 지금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계신다. 내 친족 가운데 가장 잊을 수 없는 분으로 각인되어 있다.
1968년 5월 30일, 노스웨스트 비행기는 밤새워 태평양을 횡단해 나를 시애틀에 내려놓았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과 똑같았다. 한잠도 잘 수 없었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도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도시, 시애틀에 내렸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그날은 미국 현충일이라 도시가 한적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5월 30일을 기억하고 있다.
이튿날 워싱턴대학을 찾아가 “사실 돈이 없어서 여름에 일해서 가을학기에 등록하겠다.”라고 고해성사를 했더니 대학은 그 자리에서 내 입학허가를 취소했다. “당신은 다음 끼니를 걱정하면서 어떻게 공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허망했다. 정직이 통하지 않았다. 그 당시 유학생이 환전할 수 있는 한도액은 300달러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디애나 대학 입학허가를 받아놓은 상태여서 걱정하지 않고, 여름 일을 찾아 나섰다.
시애틀 중심가의 루스벨트 호텔에서 일했다. 호텔 안 그리스 음식점에서 밤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8월 말 인디애나로 떠났다. 한 학기 등록금과 한 학기 생활비를 벌었으니 시애틀은 내게 고마운 도시, 미국의 고향이 되었다.
고향과 고행은 아주 가깝다. 지난해 다시 찾았을 때 호텔은 거기 그대로였지만 그때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내륙으로 들어온 바다를 품은 채 시애틀은 더 화려하고 큰 도시가 되어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고 나를 거부한 대학도 의젓하게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디애나 대학은 인디애나주 남쪽에 위치한 ‘꽃피는 마을’이라는 대학촌에 있다. 3만 5천 명의 대학생들이 살다 떠나는 청춘의 항구이다.
그 대학 예산이 한국정부 예산보다 컸고, 최근 미국 수영선수로는 세계 기록을 경신한 미시간 대학 출신의 마이클 펠프스가 있으나 그 당시 인디애나 대학교 수영선수였던 마크 스피츠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 7개를 획득하며 7종목 세계 신기록을 세우는 것을 보고 나는 몹시 놀랐다. 그때까지 한국은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도 얻지 못했을 때였으므로 말이다.
내 전공 분야는 정치학, 그중에서 행정학 그중에서도 환경정책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에는 환경이란 말도 나돌지 않던 때였다. 1960년대 중반 한강에서 기형 물고기가 잡혔다는 신문기사가 나와도 한국은 물고기와 수질오염을 연관시킬 수 있는 학문적 토대가 매우 미개한 상태였다.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처음으로 환경정책과 행정을 학문 분야에 세워놓은 린턴 키이스 칼드웰 Lynton Keith Caldwell 교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며 나에게 그런 기회를 준 인디애나 대학이 고맙다.
환경정책이 무엇을 공부하는 과목이냐고 물으니, 칼드웰 교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공부하는 과목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자신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노래하는 한국의 시인이라고 소개했고 그는 이 분야에 시인도 들어와야 한다고 환영해주었다.
정치학, 행정학 공부에도 석학들은 내가 문학작품에 나타난 인간의 성품과 조직(관료제), 리더십, 권위 그런 것들을 연구논문으로 쓰게 해주었다. 과학적 자료를 통해, 가설의 검증과정을 거처 이론을 만드는 사회과학이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한국에서 온 청년에게 상상력 Imagination과 통찰력 Insight을 바탕으로 하는 활력적인 또 따른 문을 열어주었다.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연결하는 다리를 내가 놓기를 그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인디애나 대학이 강조하는 시적 상상력의 위대함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지식은 한계가 있으나 상상력은 세상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라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나는 인디애나 대학 학생회에 외국 학생대표로 선출되어 참여했다. 반전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의 거친 역사의 물결이 인디애나 대학을 강타하고 있을 때 히피 아이들이 내게 외국 학생대표로 나서라고 종용했고 나는 받아들여 남미계 학생과 경쟁, 압도적인 다수표를 얻어 승리할 수 있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 수가 남미계 학생들보다 훨씬 많았다. 반전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이 나에게 새로운 미국을 발견하게 하였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인디아나의 꽃에게」와 「미국」이란 시를 대학신문에 발표했다. 시인은 시를 남긴다.
인디애나 대학을 떠날 무렵 거기서 쓴 20여 편의 시에 그림을 그려 한 달 동안 학생회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미국의 주요언론이 이 색다른 시화전을 중요기사로 다루었고, 미국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이 한국어로 전시회 기사를 번역, 소개해 아버지가 읽으시고 행복하셨던 추억이 새롭다. 그 기사 번역에 최연홍이 아닌 최양홍으로 인쇄된 것을 최연홍으로 바꿔놓으시고 액자에 넣어 보관하셨으니 시를 사랑한 아버지께 드리는 작은 보답이 되었다.
나는 내 영문 이름에 ‘연’을 Yearn “그리워하다”라는 뜻으로 표기해서 생긴 오역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내가 시인이어서 그렇게 영문 표기하고 있다고 변명하고 싶다.
여기에 내가 외국에서 처음 발표한 「나의 항해」란 시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나의 항해
갈매기,
그리고 사물의 견고함을 지닌 살아 있는 자의 고독
나의 항해는
태평양의 밤 어둠 속에서
신선한 모험으로 빛난다
먼 외국 땅에서 나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
내 조국 땅에서 나는 무엇을 버렸던가
파도는 거칠고 바람은 분다
돛은 삐걱이고
아, 나는 행복을 찾고 있는가
영혼 깊이로 파고드는 빛나는
저 푸른 파도
파도 위에 떨어지는, 햇살
나의 야망은 폭풍우를 갈망하고 있는가
마치 폭풍우 온 후 평화가 화엄이듯
그러나 내 항해의 마지막 정박지를
아무도 모른다
바람이 분다, 오 바람아, 불어라
바다에
거대한 고독 안에서
내 마음은 깃발이다
거대한 하늘과
바다 사이에
하얀 포말을 따라 갈매기가 난다
갈매기는 참, 부드럽다
거친 파도 속에
<
최연홍<시인,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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