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서 브렛 캐버노의 흉내를 낸 할리웃 배우 맷 데이먼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조소와 분노로 가득찬, 잔뜩 일그러진 얼굴표정 하나로 캐버노의 이미지를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지난주 연방상원 청문회에서 캐버노가 행한 증언은 대법관 지명자는 고사하고, 판사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는 아예 판사답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청문회 내내 캐버노와 똑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던 린지 그레이엄 역시 상원의원답지 않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트럼프의 지지를 견인하는 동력, 특히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의 주된 특성으로 꼽히는 분노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상원 청문회는 백인 남성들의 분노가 식당에 둘러앉은 백인 육체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그 같은 분노는 인생이라는 도박에서 짭짤한 성과를 거둔 사람들, 다시 말해 엘리트층의 일부로 간주되는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다시 말해 증오는 고소득과도 동행이 가능하며, 실제로 그런 경우가 대단히 잦다.
유권자들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것은 세계화로 인해 근로계층이 느끼는 “경제적 불안감” 때문이었다는 가설은 현재 이와 상충되는 압도적인 증거를 마주하고 있다.
사실 경제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못지않게 트럼프를 지지했다.
대신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구별 짓는 특징은 인종적 반감이다.
게다가 이 같은 반감은 소수집단이 야기한 실질적인 경제적 손실이 아니라 변화하는 국가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동력을 얻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다시 말해 변화하는 사회 환경에서 백인 남성이 누리는 특권이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이다.
객관적으로 보아 현재 충분히 안락하고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삶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지위에 대한 불안(status anxiety)이 불러일으키는 쓴 맛에 사로잡힐 수 있다.
아마도 독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가 힘들지 모른다. 훌륭한 일자리와 안락한 삶이 질시와 증오를 예방해 준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본성과 세상을 너무도 모르는 소리다.
나는 내 성년기의 거의 전부를 점점 희소화 되어가는 학계에서 보냈다. 그곳은 소득도 괜찮고, 작업환경도 훌륭하다. 그러나 많은 학계 인사들은 그들이 적을 둔 곳이 하버드나 예일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분노한다. 그런가하면 하버드나 예일의 학자들은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똑같이 씩씩댄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고급스런 반감, 즉 대단한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것으론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 또는 그들의 특권이 사회적 변화로 인해 잠식당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분노가 현대 보수주의 운동에 짙게 배어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최상부에서 시작된다. 걷고, 말하고, 골프를 치는 등 살아 움직이는 분노 덩어리가 바로 트럼프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의 경우 백악관의 주인이라면 이제 더 이상 대학시절의 기록에 관해 거짓 주장을 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트럼프는 아직껏 그가 그토록 원하는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 버락 오바마를 상대로 그가 벌이는 지하드(성전)의 연료는 부러움이다: 오바마는 흑인 남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트럼프에게는 없는 품위와 균형 잡힌 태도를 갖고 있다. 트럼프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캐버노도 트럼프와 대단히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단지 크고 작은 거짓말을 잘 하는 성향만 비슷한 게 아니다. 숫한 언론 보도가 전하듯 성추행 의혹에 휩싸인 캐버노가 세상을 향해 내보인 성난 얼굴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동창들은 그가 예일대 재학시절에도 호전적인 술고래였다고 밝혔다.
빌 클린턴을 공격하는데 힘을 보탰던 캐버노는 당시 특검인 켄 스타에게 보낸 메모에 “그의 구역질나는 행동의 패턴을 명백히 밝히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냉소주의와 분노가 진하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캐버노도 숫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난 아무런 연줄 없이 예일대에 입학했다’며 고질적인 버릇대로 과거 학창시절의 기록을 미화한다.
사실 그는 할아버지가 예일대 출신이었기에 일종의 음서제도인 동문자손 우대정책의 혜택을 입었다.
나는 캐버노가 그토록 화가 난 이유가 그의 특권적인 뿌리의식 때문일 것이라 추측한다.
나도 예일대 재학시절 공부벌레 축에 속했지만 특권층 자제로 파티를 즐기고, 든든한 연줄 탓에 여성을 향한 폭력적인 행동을 비롯, 그들이 저지른 잘못된 행동에 따른 모든 결과로부터 완벽히 보호를 받는 캐버노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과 종종 마주쳤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엘리트 특권층은 지금도 버젓이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포위된 특권이다. 점차 다양화 되어가는 사회는 올바른 가문 출신의 백인 남성이 세상을 경영하기 위해 신으로부터 받은 권리 따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율권을 지닌 교육받은 여성들이 등장한 이후 한때 힘 있는 남성들에게 인정했던 초야권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지닌 특권의 일부를 잃게 될 것이란 전망보다 특권에 길들어진 남성을 더욱 화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도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규정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주 우리가 들여다 본 것은 트럼프주의(Trumpism)의 영혼이었다.
그것은 포퓰리즘(대중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다. 브렛 캐버노처럼 반 근로자적인 판사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트럼프주의는 근로계층 뿐 아니라 백인 남성들과 상위계층의 분노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적인 위치에 가해지는 위협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그리고 바로 그 분노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을 파괴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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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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