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DC 이스턴 마켓 (Eastern Market)
이스턴 마켓 전경(위)과 이스턴 마켓 앞 파머스 마켓 모습.
살다보면 의기소침해지는 날도 있고 온몸의 생기가 소진된 것 같은 날도 있다. 그럴 때면 시장을 찾고는 했다. 태평양 건너기 전에는 서울의 남대문시장엘 갔었다. 거기 살아 숨 쉬는 삶의 현장에 서면 시장의 팔팔한 생기가 몸으로 전이되어 기분이 좋아지고 삶의 의욕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 와서는 그런 활기찬 시장을 아직 보지 못했다. 아직 안 가본 곳이 많아서이리라. 언젠가는 그런 시장을 만날 날이 있겠지. 그래도 주말에 워싱턴 디씨 안에 있는 이스턴 마켓(Eastern Market)에 가면 남대문시장의 왁자지껄 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쯤은 그런 맛을 볼 수 있다. 워싱턴 메트로 지역에 이런 시장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고종 10년에 개설된 유서 깊은 시장
이스턴 마켓. 워싱턴 디씨의 연방의사당에서 몇 블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실내시장이다.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인 1873년(우리의 고종 10년)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시장. 이스턴 마켓 전철역에서 이스턴 마켓으로 가는 7번가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펜실베이니아 에비뉴를 건너게 되는데 이 때 왼편으로 눈길을 주면 의사당 건물의 하얀 꼭대기가 저 멀리 보인다. 그걸 보면 이 시장은 퍽 높은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장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영업을 하고 월요일은 쉰다. 이스턴 마켓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시장 자체뿐만 아니라 화요일이면 건물 앞에서 열리는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시장 주변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의 노점상이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에 나오는 노점상과 일요일에 나오는 노점상은 조금 다른데 여기서는 토요일을 기준으로 한다.
이스턴 마켓 구경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건물 안에 있는 실내시장인 이스턴 마켓, 이스턴마켓 건물 앞의 고정식 천막 아래에 펼쳐지는 파머스 마켓, 이스턴 마켓 건물 북쪽의 럼지 플라자(Rumsey Plaza)에서 펼쳐지는 즉석 먹거리 장터, 이스턴 마켓 앞의 7번가와 C스트리트 거리에서 열리는 이동식 천막 아래의 벼룩시장(flea market) 그리고 이스턴 마켓 부근의 일반 상점들.
-정육점, 치즈, 생선, 꽃집…
먼저 이스턴마켓 실내시장으로 들어가 본다. 이 실내시장은 크게 둘로 나뉜다.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있는 남쪽 홀(South Hall)과 각종 행사를 위해 빌려주는 공간인 북쪽 홀(North Hall).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높다란 천장에 눈길이 간다. 중앙집중식 냉난방이 없던 그 옛날에는 이렇게 천장을 높여서 그나마 공기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실내시장 안에는 손님이 길게 줄을 선 빵집이 있고,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파는 정육점과 닭고기를 파는 가게가 여럿 있다. 치즈 같은 유제품을 취급하는 가게도 있고, 생선을 파는 집 하나에 꽃집도 있고 청과물과 잡화를 취급하는 가게도 있다. 어느 닭고기 파는 집 진열장에는 닭발, 닭모래집 그리고 닭간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리저리 다니다보니 찐만두를 판다는 게시물이 눈에 들어온다. 만두야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사람도 일본사람도 먹지만 가게 한 켠에 신라면이 전시되어있는 것을 보고 한인이 주인인가 보다고 생각할 밖에. 만두를 주문하면서 말을 걸어보니 역시 한인. 이 가게에서는 김치, 비빔밥 같은 우리 음식도 판매하는데 적잖은 미국사람들이 사간다고 한다. 이스턴 마켓 안에서도 한식의 세계화는 진행되고 있다.
남쪽 홀에서 북쪽 홀로 나가다보면 오른쪽에 식당이 하나 있는데 토요일 한낮에는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로 몹시 붐빈다. 그 식당을 지나서 왼쪽을 보면 화장실이 있고 급수대도 있다. 이 건물 지하에는 도예공방이 있는데 도자기 만드는 것에 관심있는 지역주민이면 혹 모를까 구경 온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의 공간인 것 같다.
-파머스 마켓
다음은 파머스마켓. 이스턴마켓 건물 앞에 고정식 천막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메릴랜드, 버지니아, 펜실베니아,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생산된 농산품을 판매한다. 4월부터 12월까지는 매주 화요일 오후 3시부터 오후 7시까지 잠깐 파머스마켓을 연다.
많은 가게가 맛보기 접시를 준비해두었는데 어떤 가게는 직원이 아예 접시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식을 권유하기도 한다. 파머스마켓을 다녀보면 알겠지만 가격은 싸지 않다. 원래 돛대 밑이 비싼 법이다. 그럼에도 파머스마켓에서 사는 이유는 거기 판매되는 상품에서는 대형 그로서리 매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에서 맛볼 수 없는 농산품 고유의 그 맛이 있기 때문이다.
-나들이의 즐거움, 거리 음식
주말 나들이 나온 사람에게 가장 큰 유혹은 푸드코트에 있다. 이스턴마켓 안에도 식당이 하나 있지만 이스턴마켓 부근의 수영장 앞인 럼지플라자에 있는 야외 천막 밑에서 판매하는 다양한 거리음식을 맛보는 것은 주말 나들이를 더욱 즐겁게 한다.
다양한 오이절임을 판매하는 천막, 중남미 음식을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천막, 필리핀식 꼬치구이를 맛볼 수 있는 천막, 어린이들의 발길을 붙잡아 두는 아이스볼 천막, 만드는 과정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미니 도넛 천막 등 많은 먹거리가 있다. 여기 가게에서 산 음식을 먹으면서 수영장 벽에 그려진 인어공주 벽화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 날이 더운 날은 꼬마 손님들이 스노우볼(snowball) 판매점으로 몰리는데 그 옛날의 알록달록한 빙수가 생각나는 곳이다.
토요일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받아 자연 분해시키는 일을 하는 천막이 있는데 디씨 당국이 운영한다. 그 앞 벤치에 앉아서 잠시 지켜보았더니 퍽 많은 사람들이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온다. 지구를 지키는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원한다.
-벼룩시장도 있네
네 번째는 주말에 열리는 이스턴마켓 주변의 벼룩시장. 주말에 외지사람들이 몰리는 가장 큰 이유이다. 여기의 노점은 골동품, 수공예품, 장신구, 비누, 양초, 사진, 유화, 의류 등 온갖 종류 품목을 취급하는데 그 수가 100개가 넘는다. 이 노점상도 역사가 깊다. 1889년에 촬영한 사진에 이미 노점상이 등장하니 말이다. 벼룩시장이라는 게 그렇듯이 뭐 딱히 살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어도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는 재미가 퍽 좋다.
그 중에 오래 머무는 곳은 강렬한 색상을 가진 흑인 옷 가게. 우리로서는 도저히 소화해낼 수 없는 색상을 그들이 입으면 아주 멋지다. 그 색상의 신비함 때문에 발길이 머무는 곳이다. 발길이 오래 머무는 다른 한 곳은 옛날 지도를 파는 곳인데 1800년대 후반과 1900년 초반의 시기에 발행된 지도들이 대부분이다. ‘독도는 우리땅, 일본해 아닌 동해’를 떠올릴 수밖에 없어서 혹시 그런 지도가 있는지 뒤적뒤적하게 된다. 그런 지도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그 옛날 지도에서 우리 지명을 어떻게 표기했는지 관찰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대도시는 어디였는지 알아보는 것도 가외의 재미. 예를 들면 그 당시 지도에 호남의 나주는 있어도 광주는 없다.
벼룩시장은 야외이기 때문에 반려견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이 퍽 많은데 그러다보니 강아지 먹이를 파는 곳도 있다. 그리고 벼룩시장 한 켠에는 손금 봐주는 여인도 있으니 혹 궁금하면 재미삼아 들러보시고. 장신구 판매하는 곳에서 꼬마 숙녀 셋이 나란히 서서 상품을 만지작거리는 뒷모습을 보면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나이와 상관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고서점
마지막으로 주변 상가. 토요일이라 이스턴마켓 주변의 업무용 사무실은 문을 닫지만 음식점과 소품 판매점 등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을 위해 문을 연다. 음식점은 느지막한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어떤 음식점 입구에서 거리의 악사가 금관악기로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20여 분 동안 그의 연주를 감상했다. 그 앞을 떠나면서 그의 돈 통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주변 상가 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중고서적을 취급하는 캐피틀힐서점(Capitol Hill Books). 1990년에 개점했는데 창업주가 남긴 뜻인 “‘좋은’ 헌책을 거래함으로써 ‘좋은’ 헌책을 즐길 수 있게”라는 정신이 살아있는 가게이다. 세 개층 모두 중고서적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천장에 닿을 만큼 가득 쌓인 책들 앞에 서면 마치 시간이 멈춰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책장 뒤에는 알 수 없는 신비로 이어지는 비밀의 문이 있을 것 같다.
대형서점도 문을 닫는 판에 이런 동네헌책방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을 해보면 조금 짠하다. 원래는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오려고 들어갔는데 그동안 마음에 두었던 책이 눈에 쏘옥 들어오니 냉큼 살 수 밖에. 그러고 보니 이 가게에 들어온 사람 중에 빈손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다.
책값은 책의 앞의 첫 쪽이나 두 번째 쪽 상단에 연필로 기재되어있다. 우리와 관련된 얘기 하나. 책방 입구 오른쪽 책장 아래에 한국전쟁에 관한 책들만 모아둔 곳이 있다. 미국사람들은 한국전쟁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궁금했지만 오래 지체할 수 없어서 잠깐만 들여다보고 나온다. 아쉽다.
-이스턴 마켓의 역사
이스턴마켓은 관광용 시장이 아니다. 토요일, 일요일에 벼룩시장이 열려서 외지인들이 나들이 삼아 오기는 하지만 이스턴마켓은 생활 속의 시장이다. 이 주변 사람들이 먹거리를 사기위해 아침 저녁으로 들리는 생활 밀착형 시장이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연방의회 의원들이 장보러 나오기도 한단다.
마지막으로 이스턴마켓과 관련된 역사 한 자락. 여기의 이스턴마켓이 건축되기 전인 1805년부터 1872년 사이에는 아나코스티아강 부근에 시장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물류가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지역 많은 주민들의 요구가 있어서 이곳에 시장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이스턴마켓이다.
이스턴마켓은 워싱턴 디씨를 설계한 피에르 랑팡(Pierr L’Enfant)의 도시 설계에 이미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독일계 이민자인 아돌프 크루스(Adolf Cluss)이다. 중앙현관 왼쪽에 세로로 긴 사진에 중절모를 쓴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건축가 아돌프 크루스이다. 이스턴마켓은 2007년에 화재가 났었고 2,200만 달러를 들여 보수한 후 2009년에 다시 열었다.
점차 선선해지는 가을날에 가족 모두가 한나절 나들이 하기에 좋은 곳이다. 멀지도 않고.
방문정보
<이스턴마켓>
●주소 : 225 7th St SE, Washington, DC 20003
●인터넷 : http://easternmarket-dc.org/
●영업시간 : 화-금 오전 7시-오후 7시, 토 오전 7시-오후 6시, 일 오전 9시-오후 5시, 월 휴장
●전철교통편 : 이스턴마켓역(Eastern Market Station) 블루, 오렌지, 실버라인
●주차 : 콜로니얼주차장(Colonial Parking)-C스트리트와 6-7번가 사이
●편의시설 : 식당, 화장실, 급수대
<화요일의 파머스마켓> 4월-12월 오후 3시-오후 7시
<도예공방>
인터넷 : http://www.easternmarketpotte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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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성식 (VA, 스프링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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