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옛 친구나 옛날에 알던 사람들을 만나면 그렇게 좋아하고 반가워할수가 없다. 왜냐하면 생소한 것보다는 익숙한 것에 길들여지고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이주 전에 내가 속해있는 ‘좋은 나무’ 모임에서 경희대 사이버 대학 교수이며, 유명한 평론가이신 홍용희 평론가를 모시고 문학 포럼을 가지게 되었다. 그분이 타고 오시는 비행기가 연착을 하는 바람에 강의는 짧게 끝나버렸지만, 그날 김소월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시를 가지고 정감있는 평을 하셨다.
참석한 사람들이 거의 연로하신 분들이기 때문인지 현대시 보다는 ‘진달래꽃’이라던지 ‘초혼’같은 시가 더 우리들의 정서에 맞는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분이 이번에 라스모어 친구 집에 이틀을 유숙하셨기 때문에 나는 운좋게 그분과 가까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분은 이제 겨우 오십대 초반인데 내가 문학 초년생으로 명동을 누비고 다니던 대학 시절에 ‘갈채’라는 다방에 모여들었던 유명한 문인들을 마치 가까운 친구처럼 다 알고 있었다.
소설가로선 김동리, 박경리, 한말숙, 정을병, 정연희, 또 수필가였던 손소희씨며 시인으로는 미당 서정주, 박두진, 천상병, 박재삼 등등 손으로 꼽아도 모자랄 지경의 많은 문인들을 알고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물론 그분은 그분들의 저서를 통해 알고 있겠지만 오랫만에 나는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 그분의 이야기에 취해 있었다.
새삼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고 눈물나게 그 옛사람들이 그리워졌다. 나는 대학 삼학년때 시인이며 연세대 교수였던 박두진 선생님을 통해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능금 나무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상당한 칭찬을 받으며 친구인 왕수영과 함께 그야말로 화려하게 데뷰했다. ‘내 볼이 빠알간 능금이라 이름 하면 나는 버얼써 이만큼 자란 한그루 능금나무’ 시는 아마 이렇게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스무살도 채 안되었던 때인 만큼 벌써 육십년도 더 지난 옛날 이야기다. 그야말로 꿈을 먹고 살던 시절이다. 나와 몇 명의 문인 지망생 친구들은 강의가 끝나는대로 명동의 갈채 다방으로 몰려가 우리들이 선망하던 문인들이 나오기를 고대하며 무조건 기다렸다. 어느 날은 한잔의 커피도 시킬 돈이 없던 그야말로 가난하고 가난한 햇병아리 시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가난했지만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우리에겐 꿈과 희망과 젊음이 있었고 넘쳐나는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참 날리던 문인들은 이제 거의가 다 고인이 돼버렸다. 그날 나는 그분에게서 너무나 과분한 칭찬을 들었다. 미국에서 거의 오십년을 산 분이 어떻게 그리도 한국인의 정서와 감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느냐며 내 책을 그날밤 몇장만 읽으려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다 읽어버렸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많은 문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도 책을 받았지만 자신이 끝까지 읽은 책은 내 책 ‘웨스트 버지니아의 오두막집’이 유일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분은 ‘두별’이라는 내 산문을 소설로 써보라는 친절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나는 한번도 소설을 써보지 않았다. 다만 수 십년 전 <여성중앙> 창간호에 ‘데니의 연가’로 내 수기가 당선 되었고, 언젠가 한국일보에 ‘망향의 노래’와 월간 중앙에서도 내가 미군부대를 다닌 시절의 체험을 쓴 넌픽션에서도 당선된 경험이 있다.
‘두별’은 내 첫사랑의 이야기다. 내가 대학 일학년이던 시절 열아홉 나이에 나는 첫사랑에 빠졌고, 우리들은 어느 아름답던 가을 어느날 태능 숲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맹세하고 낙엽이 쌓인 그 숲에서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흰눈처럼 순결하고 너무 아름다워 슬프디 슬픈 그 아득한 시절의 첫사랑, 만나는 횟수보다 서로 멀리 떨어져 편지로만 안타까운 그리움을 전하던 사랑, 이제는 그 첫사랑의 기억도 아련하고 그 얼굴은 잊었지만 그 목소리만은 아직 귓가에 생생하게 맴도는 것 같다. 그 신비하고 아련한 밤하늘에 빛나던 두별, 사랑은 언제나 덧없다지만 그 두별을 두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던 어리석지만 순수하던 그 영혼들, 그 깨끗한 영혼들은 이제 다 어디로 갔나.
오랜 세월과 시간 속에 젊은 날의 순수함은 다 빛바래지고 이젠 남은 추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옛날의 기억을 더듬으려고 해도 아물아물 사라져가만 가는 늙어가는 육신과 가버리는 세월의 무상함만 탓해야 하는가.
나는 내 시간이 다 가기 전에 두별에 대한 그 간절했던 첫사랑 이야기를 한편의 소설로 쓰고 싶다. 내 삶의 미션이 이땅에서 끝나기 전까지 아직은 오늘을 성실히 살고 싶다. 이제 그때 그시절의 그리운 얼굴들은 이 땅에서 다 사라져갔지만, 난 아직 살아있기에 지금 이 시간의 소중함을 아끼며 살고싶다. 하루하루 재미있게 품위를 가지고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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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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