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무언가 기진맥진하고 희망이 소진됐을 때 꿈을 꾸게 된다. 그러니까 자기 힘으로 하려는 허우적거림, 물에 빠진 자가 자신을 놓아버리고 포기할 때 무언가 비추는 한 줄기 서광, 그런 것을 우리는 꿈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게 우리는 가장 힘들 때, 연약할 때 꿈을 꾸게 마련이다. 꿈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모습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꿈이 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추억도 희망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 마치 영혼의 그림자에 아무리 카메라의 렌즈를 들이대도 단 하나의 사진도 찍을 수 없는 그런 삭막한 삶을 말한다고나 할까. 그러한 삶은 있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누구나 꿈없는 현실을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꿈이 더 이상 자신의 곁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꿈이 던지고 있는 비현실성, 즉 꿈과의 전쟁에서 패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변명하자면, 나에게는 지금 어떤 꿈이 있나? 의심스럽다. 스스로 졸(卒)하고 늘 짝사랑이나 하고, 자기에게 없는 것이나 탓하고 꿈꾸는 자 보다는 스스로에 옹색한, 그런 개꿈조차 꾸지 못하는 (현실의) 내가 꿈에 대해 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지금 어떤 꿈이 있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꿈을 어떤 희망 사항이라고 한다면 나에게도 꿈은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남에게 존경받는다거나 경쟁에서 이긴다거나 명예를 상징하는 어떤 간판을 위해 그 주위를 서성거린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좌절하거나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시기심도 강했다. 하나를 심고 열을 거두고자 하는 욕심도 컸고 만족하는 비율보다는 허영에 부푼 풍선을 타고 늘 뜬 구름처럼 살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소귀의 명예를 기술적으로 부풀려 가며 야금야금 음미하는 재미, 친구나 지지세력을 위해서는 더 많은 친절과 은혜를 베풀고 반대파나 적대세력에 대해서는 야멸참과 흠집내기 식의 얄팍한 현실감각으로 살아온 적도 많았다. 그것도 나름 재미가 있었고 또 못 이룬 꿈을 어느 정도 원수갚는 쾌감도 따랐다.
그러나 그런 것도 결국 시시하게 만드는 것은 역시 세월이다. 세월은 친구도 변하게 하고 미움과 집착도 사라지게 하니 세월은 약인 것일까 독인 것일까? 십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이름 모를 꽃들, 상처입은 사람, 포화 속에 잠들어 간 이름없는 비목까지 이제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꿈은 나의 것이 아닌 것은 꿈이 아닌 것을,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심고 하나씩 길들이고 물주고 자라게 하는 것임을 왜 나이들기 전 꿈꾸는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것일까?
슈만의 피아노 소품 ‘꿈’(트로이멜라이)를 듣고 있으면 늘 떠오르는 정경이 하나 있다. 최초로 손에 쥐어본 까만색 LP판 클래식 소품 집이다. 나의 것이 아니라 다니던 교회의 목회자 사택에서 빌려온 것인데 여덟 장쯤 되는 전집으로 기억된다. ‘트로이멜라이’와 ‘터어키 행진곡’, ‘소녀의 기도’, ‘타이스 명상곡’ 등이 들어 있었는데 친구와 나는 작고 둥그런 LP에서 그처럼 신기한 소리가 끝없이 새어 나온다는 것이 신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LP 나 전축이 전혀 없었던 시절은 아니지만 그때는 클래식 판이나 전축이 그만큼 귀했다.
친구와 나는 그 당시 재수를 하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던 어느 형네집으로 먼 거리를 걸어 음악을 들으러 가곤 했는데 여러 마리의 소를 사육하던 그 형네 집이 왜 그렇게 부럽던지. 그것은 그 형네 집이 아름답고 소박한 전원 주택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집에 전축이 있고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우유, 다과 등을 나누며 끝없이 음악을 듣곤 했는데 야속하게도 시간은 너무도 빨리 저녁을 알렸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등지고 집으로 귀가해야만 했다.
그때 처음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음악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고 또 전축을 갖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간절한 욕망의 꿈을 꾸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뜬구름과 더불어 흘려보낼 수 있으면서도 왠지 그 가장자리에 머물러 바라만 보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그 무언가의 희열, 짝사랑 같은 그 대상이 생겼다는 뜻이다.
예술가를 직업으로 삼고 또 그 아름다운 꽃을 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꿈이 생기는 순간 나는 이미 예술가였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또 그 꿈을 품고 사는 삶, 물론 그것은 이 세상에 현실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고독하고 소득없는 것이기도 했지만 무언가 때묻지 않고 순수한 신앙하는 마음, 나는 멀리서 바라보는 음악이 좋았다.
사람에게 꿈을 안겨주는 음악들은 여럿 있다. 슈만의 꿈(트로이멜라이), 멘델스존의 론도 카프리치오소(rondo capriccioso), 쇼팽의 아름다운 녹턴(야상곡)들도 모두 꿈을 나타내는 음악들이다. 조국 폴란드와 첫 사랑의 소녀를 위해 남겼다는 쇼팽의 이별곡도 아련한 꿈을 담은 작품이지만 낡은 LP판의 ‘트로이멜라이’ 그것이 지금껏 꿈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때 그 시절 그 음악이 나에겐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사실은 피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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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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