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돌아가는 상황이 그때와 대단히 흡사하다.
20년 전 아시아 금융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 사람들이라면 지금 터키가 그때의 상황을 재연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 법하다.
돌아가는 꼴을 보면 영락없이 그렇다.
각본은 이렇다. 어떤 이유에서건 해외 대출자들의 눈에 들어 수년간 막대한 해외자본 유입을 경험한 국가를 상정해 보자. 이때 유입된 부채가 국내통화가 아닌 해외통화로 표시 된다는 점이 결정타다. (미국 역시 과거에 적지 않은 해외자본을 끌어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유사한 취약성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미국의 부채는 모두 달러화로 표시된다.)
빚으로 벌이는 잔치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어떤 시점에 이르면 잔치는 끝난다.
외자유입의 ‘갑작스런 중단’을 초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위를 경제정책 감독관으로 지명하는 것과 같은 국내 사정 때문이거나 아니면 미국의 이자율 인상이라든지, 투자자들이 인지하는 다른 국가의 위기 상황 탓일 수도 있다.
외자 쇼크의 내용이 무엇이건, 해외부채가 국가 경제를 파탄의 소용돌이로 밀어놓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문제다. 두려움이 촉발한 자신감 상실은 국내 통화의 가치 하락을 불러 온다; 이렇게 되면 해외 통화로 부채를 상환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이는 다시 실물경제를 해치고 경제에 대한 신뢰감을 추가로 떨어뜨리면서 자국 통화의 추가 하락을 가져 온다.
이렇게 파장은 계속 확대되고 그 결과 GDP 대비 해외부채는 대폭발을 일으킨다.
인도네시아는 90년대 GDP대비 해외 부채율이 60%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위기에 휘말렸다. 이 수치는 올해 초 터키의 해외 부채율과 비슷한 수준이다. 1988년에 이르러 인도네시아 통화인 루피아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해외부채는 거의 GDP의 170% 선까지 치솟았다.
이런 종류의 위기는 어떻게 마무리될까?
효과적인 정책대응이 없으면 통화하락과 국내통화로 측정한 부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결국 파산신청이 가능한 사람들 모두가 실제로 파산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통화 약세가 수출 붐을 일으키고, 경제는 막대한 무역흑자에 힘입어 회복되기 시작한다. (터키 통화의 약세에 대한 징벌로 이스탄불에 응징적 관세를 부과하려드는 트럼프에게 이 같은 상황반전은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안겨줄 것이다.)
이런 순환구조를 개선할 방법은 있는가? 있긴 하지만 위험스럽다.
위기 비용을 축소하는데 필요한 것은 경제정책에 단기적 이단(heterodoxy)과 장기적 정통성(orthodoxy) 회복에 대한 믿을만한 보장을 한데 결합시키는 것이다.
작동원리는 이렇다: 공황상태에 빠진 자본이탈에 제동을 걸기 위한 일시적인 자본통제와 가능하면 일부 해외통화채의 지불거절을 한데 묶어 부채율의 폭발적 증가부터 잡는다.
이와 함께 위기가 끝나면 재정적으로 지탱 가능한 정권이 들어서도록 준비 작업을 벌여야 한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신뢰감이 점차 회복되면서 결과적으로 자본통제를 해제할 수 있게 된다.
말레이시아는 1998년 바로 이런 해법을 택했다. 한국도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은행들에게 단기 크레딧 라인을 유지하도록 압박을 가함으로써 말레이시아와 같은 시기에 비슷한 일을 해냈다.
그로부터 10년 후 아이슬랜드는 자본통제와 해외통화채 지불거부를 묶어 위기에서 벗어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슬랜드는 민간은행들이 일으킨 채무에 대한 공적 책임을 거부한 것이다.)
아르헨티나 역시 지난 2002년 이단정책(heterodox policies)으로 효과를 보았다. 그로부터 수년 뒤, 아르헨티나는 사실상 전체 채무의 3분의2에 대한 지불을 거절했다. 그러나 크리히너 정권은 이단 정책을 중단하고 정통주의로 다시 돌아갈 시점을 알지 못했고, 이로 말미암아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기 속으로 밀어 넣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예는 금융 위기를 다루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위기를 벗어나려면 특별한 조치를 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기술적 능력이 있고, 부패를 막아내며 정책 집행을 할 수 있을 만큼 정직한 것은 물론 유연하면서도 책임감을 지닌 정부를 필요로 한다.
유감스럽게도 에르도안의 터키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트럼프의 미국도 아니다. 그러니 미국의 부채가 모두 달러화로 표기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칼럼니스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