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팔십이 된 사람이 ‘친구야! 놀자’ 하며 아직도 친구를 찾아다니고 논다면 좀 주책스럽기도 하고 ‘뭐야! 이게!’ 하며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늙어갈수록 친구가 필요하고 소중하게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우리들은 지금 라스모어라는 특수한 은퇴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운동을 함께하는 한국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아침 여덟시에 운동이 끝나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오늘 아침은 어디가서 커피를 마시고 아침을 먹지?’하며 서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게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맥도날드를 가고, 적게 모이면 타코벨을 간다. 라파엣에 있는 맥도날드는 가족들 단위이기 때문인지 여럿이 함께 앉을 수 있는 타원형의 의자가 있어서 편리하다. 또 일불짜리 부리또나 단돈 사불에 제대로 된 소세지 에그 머핀을 두개나 먹을 수 있고, 시니어 커피도 채 일불이 안된다. 타코벨은 커피가 일품이다. 그것도 우리 몇명은 하도 많이 가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멕시코계 여자들을 잘 주물러 놓아서 커피는 아예 공짜로 주니 일불짜리 부리또나 카사디아를 먹으면 돈 일불로 아침이 해결되니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우리는 극구 미국이라는 이 축복의 땅에 살고 있는 것을 행운이라고 몇번이라도 말하고 또 떠들어댄다.
얼마 전 한국에서 방문한 사돈집 아이들이 맥도날드의 일불짜리 치즈 버거가 한국보다 더 맛있다고 난리다. 한국엔 일불짜리는 아예 없다고 한다. 그애들 생각엔 미국 것이 무엇이든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요즘 이 라스모어도 슬슬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벌써 네명의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내 가까운 친구들의 남편 둘이 세상을 떠났고, 얼마 전에 아주 친했던 친구 한명도 우리 곁을 떠났다. 인생이 알 수 없는 것은 금방 죽을 것 같던 사람은 안죽고 생각지도 못했던 친구가 갑자기 떠나는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핸디캡들이야” 죽은 친구는 늘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이 요즘 사실로 증명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눈이 나빠져 점점 실명이 돼 가고 , 또 누군가는 귀가 안들려 반밖에 듣지 못하고, 별안간 이가 몽땅 빠져 하루 아침에 폭삭 늙은 할망구가 되어 버리고, 무릎이 아픈 것은 이제 애교고,어지럼증 때문에 불평을 했더니 의사 말이 늙어서 그러니 그렇게 알고 그런대로 살라고 했다는 얘기까지 들으니 어디 억울해서 살겠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내 가까운 친구 중에 한 사람이 귀가 나빠진 것을 시로 썼는데 그 일절이 이렇다. ‘이제 귀가 반밖에 들리지 않아도 감사하다’ 이 한마디는 정말 많은 의미를 담고있다. 이제 늙어서 귀가 나빠져 잘 들리지 않아도 감사한 것은 내가 팔십이 넘어서도 이렇게 자알 살고 있다는 말과 이젠 살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고 살 수 있어 감사하다는 뜻과 또 이젠 지금 세상을 떠난다해도 별로 억울할 것이 없다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친구는 늦게 시를 시작했고, 또 얼마 전부터 나와 함께 그림도 시작했는데 벌써 괄목할 만큼의 성과를 내고 있어 정말 한세상 자알 살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절로 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병들고 늙어가고 죽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이 운명에 순응하고 사는 사람들일수록 지혜있는 자들이다.
내가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또 십년쯤 남보다 더 산다해도 먼저 가고 나중 갈 뿐이지 가는 곳은 다 똑 같다. 아무리 오래 산다해도 병원에 갇혀 산다면 그건 사는게 아니고 인간의 존엄이란 눈 씻고 봐도 없어서 오히려 죽는게 나을 것 같다. 얼마전 치매가 와서 이젠 운전을 할 수 없다는 차량국의 통보를 받은 친구가 있다.
미국에서 운전을 못한다면 그건 치명적이다. 운전은 내게 자유를 준다. 운전을 못한다면 살아도 반밖에 살지 못하는 것이나 같다. 또 한 이웃은 미나리를 뜯다가 넘어져 크게 다쳤다. 나이 구십의 이 할머니는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이 젊었다고 착각하고 살아서 벌써 몇번을 넘어져 병원에 실려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갔더니 그녀의 남편은 침대 옆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해 일으켜 세우는데 정말 힘들었다. 남자 노인이 이토록 무겁다는 것을 나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돌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그들 부부 모두가 이젠 요양원의 신세를 져야할 것 같다.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도와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가는 곳은 한군데 밖에 없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젠 슬슬 주변에서 놀 수 있는 친구가 줄어들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핑계들이 많다. 머리가 아파서, 어지럽고 기운이 없어서, 잠을 잘 못자서하는 말로 함께 나가자면 나갈 수가 없단다.
어릴적 우리 집 밖에서 “노리꼬짱 아소버”하던 내 일본 친구들이 생각난다. 노리꼬는 내 일본 이름이다. 나는 일본 유치원을 다녀서 일본말이 유창했기 때문에 어릴 때 일본 친구가 많았다.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된 다음엔 난 그 친구들을 속으로 좀 깔보았던 것 같다. 내가 심기가 좋지 않았던 날은 “이 쪽발이들아! 당장 꺼져! 네 나라로 가란 말야”하고 호통을 쳤다.
그래도 곧 일본이 원수라는 것도 다 잊고 그 친구들과 한나절 잘 놀았다. 그 순수했던 동심이 아득한 옛날의 기억으로 새삼 그립다. 내가 속으로 두려운건 친구야! 놀자! 하며 달려갈 수 있는 친구가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수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운전도 못하고 벤치에 앉아 빨리 오지 않는 버스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처지가 되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하니 어쩐지 처량하고 슬프지만 이것이 다 인생의 한 고비임을 깨닫자 그래도 아직은 친구야! 놀자!하면 달려 나올 수 있는 친구가 몇 명 있다는 것이 새삼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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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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