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발표된 이 중요한 뉴스가 거의 회자되지 않고 지나간 것은 매우 이상하고 아쉬운 일이다.
부동산 개발업자 제럴드 벅(Gerald Buck)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땅값 대신 17세기 바로크의 거장 안토니 반 다이크의 그림 한 점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미술품 수집을 시작한 그는 처음에는 남들처럼 유럽의 인상파 그림들을 샀지만, 차츰 잘 알려지지 않고 저평가된 작가들에게 집중하게 됐다. 2차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 사이에 활동했던 다양한 캘리포니아 작가들의 작품들이다.
30년에 걸쳐 모은 3,200여점의 거대한 콜렉션을 제럴드 벅은 2013년 타계하면서 UC 어바인에 기증했다. 대학 측은 그의 사후에 변호사의 전화로 이 행운의 날벼락을 통보받았을 정도로, 아무 연고가 없고 아무 조건도 없는 기증이었다.
UCLA를 졸업한 벅이 남가주의 크고 작은 많은 뮤지엄을 놔두고 왜 UCI를 선택했는지는 가족들도 잘 모른다. 아마도 그가 가까운 뉴포트 비치에 살았고, ‘연구하는 대학’의 명성을 가진 UCI에 제대로 된 미술관이 없기 때문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남가주가 현대미술의 메카로 뜨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그 이전 캘리포니아 작가들에 대한 평가와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다른 뮤지엄의 소장품 일부로 포함되느니 이 분야를 집중 연구해줄 전문기관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 놀라운 선물로 인해 UCI는 그동안 꿈만 꾸어왔던 미술관을 건립하게 됐다. 이와 함께 새로운 박사과정과 석사과정도 신설할 계획이라니, 고인의 소망이 곧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돈 모으는 일에만 혈안이 되지 않고, 예술품을 모으는 이런 부자들 덕분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다. 나는 폴 게티가 얼마나 악명 높은 자린고비였는지 알고 싶지 않다. 게티 뮤지엄이나 게티 빌라에 갈 때마다 그를 향한 무한한 감사가 절로 솟아오르니 말이다. 그 아름다운 건축물과 정원,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수많은 예술품을 언제든 마음껏 향유할 수 있게 해준 위대한 공로를 생각하면, 비극의 가족사쯤은 이젠 좀 덮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된다.
다운타운의 더 브로드 뮤지엄이나 산타모니카에 있는 브로드 스테이지에 갈 때도 마찬가지다. 깐깐한 고집쟁이 부호 일라이 브로드가 자신의 부와 소장품을 아낌없이 내놓지 않았더라면 첨단시설의 미술관과 극장은 차치하고, 그의 막대한 후원을 받아온 라크마(LACMA)와 모카(MOCA)도 휘청거렸을 것이다.
패사디나에 있는 노턴 사이먼 뮤지엄과 헌팅턴 라이브러리 역시 일찍이 미술품 수집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던 캘리포니아의 두 거부, 노턴 사이먼과 헨리 에드워즈 헌팅턴의 가족에 의해 탄생한 미술관들이다. UCLA 해머 뮤지엄도 아만드 해머의 콜렉션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패션기업 ‘게스’의 폴과 모리스 마르시아노 형제가 이 대열에 합류했다. 한인타운 가까운 윌셔 가의 유서 깊은 건물에 마르시아노 미술관을 개관하여 자신들의 수집해온 현대미술품을 보여주고 있다.
몇해 전 유니비전 창업주 제롤드 페렌키오가 라크마 50주년 선물로 자신의 소장품 47점을 기증했다. 모네, 마네, 피카소, 세잔, 마그리트 등 최상품의 명화들이라 가치가 무려 5억달러에 이르는, 라크마 사상 최대 규모의 선물이었다.
이런 부자들 덕분에 경매시장에서 억, 억, 하고 가격이 올라가는 작품들을 우리는 코앞에서 실컷 볼 수 있는 것이다.
캘리포니아뿐만이 아니라 미국 주요 도시의 많은 뮤지엄들은 재벌 박애주의자들의 통 큰 기부로 탄생했다. 휘트니 뮤지엄, 구겐하임 미술관, 프릭 콜렉션, 필립스 콜렉션, 메닐 콜렉션, 피셔 콜렉션…
부자들은 대개 투자로 돈을 번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가장 값진 투자는 미술품을 수집하여 기증하는 일일 것이다. 생전에는 집에서 좋은 아트를 실컷 감상하고, 기증 후에는 뭇사람의 존경을 받고, 사후에도 길이길이 이름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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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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