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묵의 중국기행 3 돈황(敦煌)에서의 3일
관광객을 위하여 양관 고성을 새로 세트로 지었다.
-우미인이 자결한 위수의 강물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일행과 합류하기 위하여 심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하루를 그 유명한 진시황 병마용을 다시 구경도 하고 백거이의 장한가로 유명한 당태종과 양귀비가 즐겨 찾았던 화청지라는 온천장을 찾는 등 그렇게 보냈다.
그런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8년 만에 다시 찾은 서안은 정말 변해도 너무 변했다. 8년 전에 왔을 때에는 주나라 문 왕에게 발탁된 강태공이 낚시도 했었고, 초(楚)나라 항우가 한(漢) 나라 유방에게 패배해서 그의 우 미인이 자결했다는 위수(渭水)가 강물은 다소 줄었지만 그래도 넓은 강바닥이 있었건만 이제는 위수라는 곳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높다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기야 이제는 인구가 450만을 넘고 서안 남쪽에 삼성전자가 거대한 공장을 지어 12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삼성 타운이라고 불리는 지역까지 생기는 판이니 말이다.
그런데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에 있는 비림(碑林)은 전서, 예서, 초서, 행서의 모든 붓글씨의 보고(寶庫)인데도 가이드도 어느 누구도 비림에 가보자는 사람커녕 비림에 대해서 한 마디가 없어 현대 사람들의 관심이랄까 세대의 흐름이 그런 것인가 다소 아쉬웠다. 우리는 짧은 일정의 서안 관광을 끝내고 밤 비행기로 돈황으로 향했다. 아주 늦은 밤에 돈황에 도착하여 관광 일정은 다음날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돈황 고성이라는 테마 성을 만들었다. 그래서 여러 영화 드라마를 찍었는데 한국드라마도 여기서 몇 편 찍었다 한다. 입구에 성 공격용 마차도 보인다(왼쪽 위). 마을시장 세트(위 오른쪽). 백거이의 장한가로 유명한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한 화청지 온천(아래).
-명사산과 월아천
아침에 일어나서 눈앞에 펼쳐진 모래로 된 소위 명사산을 보며 진정 실크로드의 출발지점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아침을 먹는 식당으로 가니 ‘즉출발(卽出發) 필도착(必到着)’이란 글자가 적힌 노란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의 여러 그룹(Group)이 보였다. 일행에게 물으니 지명은 지금 생각이 나지 않으나 20명이 한 팀이 되어 약 3일간 한 때 실크로드이었던 사막을 걸어서 그곳까지 가는 시합이라고 한다. 젊음이 부러웠다. 나는 새벽 찬바람에 몸을 웅크리다가 간쑤성(감숙성)의 유명하다는 따끈한 라면국수를 즐기고 나서 돈황 관광에 나섰다.
우리 일행은 양관박물관이란 고증을 토대로 세트장 같이 만들어 많은 영화를 찍었다는 당시의 마을, 돈황고성이란 이름으로 만든 성곽, 그리고 명사산(鳴沙山)을 둘러보느라고 낙타를 타기도 하고, 그곳 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 월아천을 구경하는 등 그런대로 흥미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역시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막고굴(莫高窟, 모가오쿠)이었다.
막고굴에 대해서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가진 사전 지식이라는 것은 명사산 동쪽 1,600미터에 600개의 굴속에 조각과 벽화가 세계적인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그리고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 되었다는 정도이었다.
막고굴(위와 오른쪽). 이런 토양(아래)에 굴을 파고 회벽을 칠했다.
-막고굴의 부처님들
막고굴 앞에 섰다. 그리면서 영화 장면처럼 몇 개의 장면이 떠오르며 잠시 생각에 젖었다. 조선시대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려면 조상 위패를 모시는 사당에서 과거를 보러 가는데 조상님의 가호를 바란다고 고하며 한양으로 집신 몇 켤레를 넣은 등짐을 지고 길을 떠났다. 이태리 베니스에는 천개가 넘는 성당이 있다. 해외 원양의 무역선의 선주들이 무역선이 떠날 때에는 자기들만을 위해서 만든 성당에서 무사히 돈을 잔득 벌어서 오게 해달라고 성모 마리아에게 빌었다. 같은 개념으로 이곳 돈황에서는 실크로드로 먼 장사 길을 떠날 때에는 대상들이 이 막고굴에 모셔놓은 부처님에게 돈 잔뜩 벌어서 돌아오게 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어쩌다가? 그 동기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부처님과 보살님 특히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님의 얼굴과 몸매의 시대별, 그리고 지역별로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를 스스로 질문해 왔고 그래서 이곳 막고굴이 어쩌면 좋은 설명이 될 것 같아 이곳을 올 때부터 혼자서 그것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기로 마음을 정했었다.
-불상 조각의 변천
자료를 보니 이 막고굴의 조각이 355년 정도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355년 하면 삼국지 소설로 유명한 위, 촉한, 오의 세 나라 중에서 제일 막강했던 위나라가 삼국통일을 했으나, 곧 이어서 신하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나라를 찬탈하고 세운 서진(西晋)이 세워 졌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망한 후 소위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으로 서진이 분열하고 난립하였던 시대다.
그리고 이 돈황 지역에도 고창국이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지배했으나 그저 작은 지방정권이었다. 반면 현재의 인도, 아프가니스탄 지역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로 그리스 문명이 꽃 피운 간다라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 국가인 굽타왕국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초창기 막고굴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조각은 굽타왕국의 그리스 조각을 닮은 간다라 풍의 조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가 인도 지역에서 불교의 교세가 힌두교에 눌리고, 다시 700년대에 이슬람교가 들어와서 막고굴의 불교 조각은 간다라풍이 쇠퇴하고 중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간다. 다시 말해서 수나라, 당나라가 중국 땅에서 통일을 하고 융성하기까지는 부처님의 조각들은 그리스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간다라문명의 조각, 또 관세음보살 조각은 힌두교의 비슈누 조각상의 영향도 받은 듯하다가, 그 이후 중국문화권으로 넘어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서 본 것이라고는 가이드를 따라 제한된 굴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제한된 굴속에서 나의 짧은 지식으로 조각들을 품평을 한다는 것은 무리이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지 어떤 관점을 가지고 관심 있게 보느라고 시간 가는지 모르고 잘 즐겼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굴(왼쪽)과 신라의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과 로댕
막고굴을 나서면서 한국의 조각상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처 조각은 국가에서 시험을 쳐서 합격한 석공들만이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막고굴의 조각으로부터 시작된 조각들이 중국으로 가서 다소 예술성을 높인 조각으로 변화했고 그리다가 신라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이 탄생했다고 자부해 본다. 석굴암, 그리고 반가유상 같은 것은 세계의 으뜸이라고 자랑할 만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라가 망한 후 후삼국, 고려에 들어서면서 소위 좋은 세상 바라는 마음에서 미륵불을 너 나 할 것 없이 별별일 없는 석수들이 만들었고 그리고 그 조각 수준들이 형편없어 미륵불 이라는 것들이 석수쟁이 얼굴이라 했고, 조선시대에는 억불 정책으로 기가 죽었는지 부처가 눈을 아래로 깔고 허리를 구부정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아무리 따져 봐도 신라시대의 반가유상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보다 작품 예술성에서 월등히 우월하다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수 없고 통일 신라시대에서 그 명맥이 끊긴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혜초와 현장법사
내가 부처님 얼굴에 각별한 흥미를 갖고 가치 있는 관점으로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면, 우리 일행에 박 Y.S이라는 분은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많은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혜초 스님을 이야기하기 전에 현장법사를 이야기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실크로드로 향하는 곳에는 곳곳에 현장 삼장법사 동상이나 그와 연결된 소설 손오공으로 점철된 이야기꺼리가 꽤나 많다.
본래 서진 말엽인 서기 402년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금강경을 처음으로 한자로 번역하였고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이 현재 한국의 조계종의 경이다. 그로부터 250여년 후 당나라 때에 삼장법사 현장이 구마라집의 한자 금강경보다 좀 더 완벽한 경을 구하겠다고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에 갔다. 장장 18년이 걸린 여행이었다. 그가 돌아와서 불경을 번역했다. 그래서 구마라집의 경을 구역, 그가 한자화 한 불경을 신역이라 하며 이 경이 법상종, 구사종의 경이 된다.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사연
그로부터 다시 100년 후, 혜초(704-787)라는 신라계의 중(사실 우리가 신라인이라 하지만 중국인으로 봐야 한다)이 인도를 갔다. 내가 보가에는 견문을 넓히고자 간 것이지 불경을 얻으러 간 것 같지는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혜초가 인도에 도착 했을 때에는 인도의 불교는 쇠퇴기라 사찰이 폐허가 된 곳이 대부분이라 별볼일 없었다.
다만 그가 페르시아까지 갔는지 풍문으로만 들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중앙아시아까지의 사람들의 생활, 풍습, 여행지 소개하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써서 중요한 역사자료로 가치가 있는듯하다. 실제로 혜초는 당시 밀교라는 종파의 창시자 금강지의 제자로서 그는 젊은 나이에 신라를 떠나서 중국에서 밀교승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러다가 동행한 박S.Y.이라는 분의 이어지는 혜초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꽤나 흥미로웠다. 요점만 정리한다.
“12세기 오호십육국의 어지러운 난세에서 송나라가 세워졌으나 북에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차지하고, 티벳족이 세운 서하(西夏)의 침공으로 돈황 지역이 꽤나 어지러웠다. 그래서 많은 서적과 그림을 이 막고굴 굴속에 넣고 밀봉을 했다. 사막의 건조하고 굴속이라는 천혜의 조건으로 이 감추어진 보물이 변치 않고 있다가 1904년 30대 프랑스 고고학 탐험가 펠리오가 많은 책들을 사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내는데 앞 뒷장이 없는 책이 한권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었다.
그리고 그 책을 알아본 고고학자가 일본의 다커쿠스 준지로이었고, 그와 함께 막고굴에서 많은 책과 그림을 구입(도굴?)한 사람이 오타니 고례라고 한다. 그는 나중에 일본 총독 데라우지에게 1,500점의 유물을 주었고 덕분에 지금 한국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8년 전에 비하여 많이 확장 정리 되었다. 돈황의 병마용 1호. 장군상도 잘 복원 되었다(위). 이제 더 발굴하여 군 수뇌부, 기마 돌격대 등 2호, 3호가 발굴 전시되고 있다(아래).
많은 호기심을 충족시켜준 그리고 감동의 막고굴 관광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오면서 이곳은 최소 2-3일은 보내면서 보존을 위하여 출입을 막고 대신 막고굴과 똑같이 만든 전시장이 있다고 했다. 다음에는 꼭 가봐야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다음주 계속>
<
글·사진/ 이영묵(전 워싱턴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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