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 세월 내곁 지켜준 든든한 친구 ‘한국일보’
▶ 미 군대서 훈련받다 의병제대 후 알라메다 해군기지 기계공으로 일해...세상소식 전해주는 고마운 신문, 새벽마다 첫장 펼칠 때 지금도 설레
41년 장기독자인 이윤호씨가 한국일보를 펼치며 환하게 웃고 있다.
1969년 창간된 미주 한국일보가 올해로 창간 49주년을 맞았다. 샌프란시스코 지사는 1970년 설립됐다. 미주에서는 물론 북가주에서도 가장 오래된 한국어 신문인 미주 한국일보는 장기독자도 수없이 많다. 창간 49주년을 맞아 41년 독자인 이윤호씨 이야기를 이윤호씨 1인칭 시선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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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의 큰 꿈을 품고 나와 아내가 1977년 1월 하와이 입국 수속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불안한 미래와 낯선 땅은 그야말로 두려움 그 자체였다.
처형의 초청으로 이민와서 버클리 처형집에 얹혀 살던 시절, 남의 집 청소를 하며 미국생활을 시작했지만 꿈꾸던 ‘더 나은 삶’의 문은 열리지 않은 듯해서 답답했다. 그때마다 한국에 두고온 가족을 생각하면서 하루 빨리 성공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나는 이민오자마자 한국일보를 구독했다. 그 당시 LA에서 인쇄된 한국일보는 2-3일 뒤 샌프란시스코로 배달됐지만, 고국 소식이 실린 신문은 내 숨통을 틔어주는 존재이자 향수를 달래주는 친구였다. 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전두환 군사정권의 출범 등 모국에서 굵직한 뉴스들이 터져 나올 때 한국일보는 내 갈증을 채워주는 유일한 창구였다. 당시 조용필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이란 노래가 유행한다는 소식도 한국일보로 접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신문이 귀하던 시절이라 남에게 주지 말고 집안에 신문을 보관하라고 아내에게 신신당부했던 때였다. 41년간 한눈 팔지 않고 한국일보만 보는 독자가 된 것은 이 시절 간절했던 마음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리라.
한국을 떠나올 때 척추가 굳는 병(강직성 척추염)을 앓고 있던 둘째형이 미국에 가면 자신을 초청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미국에 왔지만 정식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나와 아내는 UC버클리 캠퍼스를 자주 걸으며 우리의 미래를 설계했다. 그런 고민 끝에 77년 8월 미국 군대에 자원했다. 월남전 참전 경험이 있던 터라 미 육군에 입대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듯했다.
4-7살 때 한국전을 겪은 나는 한강다리를 건넜던 기억, 피난중 동상에 걸려 농가에서 자던 기억들이 지금도 날 때가 있다. 첫째형과 여동생은 한국전이 끝난 직후 전쟁에서 얻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시절엔 그렇게 가족을 잃는 경우가 흔했다.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둘째형은 부분색맹으로 의대 지원이 좌절되자 고려대 상대를 나와 은행에 취직했다. 학비를 벌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한 둘째형이 과로로 그만 병을 얻은 터라 내 마음도 무거웠다. 그러나 비운은 내게도 들이닥쳤다. 미 군대에 자원한 지 11개월만에 훈련을 받다가 떨어져서 원치 않는 의병제대(질병이나 상해로 예정보다 일찍 전역하는 것)를 했다. 그때 사고로 지금까지 허리보호대를 차고 생활하며 치료약을 복용하고 있다.
이후 나는 VA(Veterans Affairs) 카운슬러의 조언으로 오클랜드 레이니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은 후 알라메다 해군기지의 전투기, 함대 등의 부품을 만드는 기계공이자 매케닉으로 일했다. 육체적 노동이 과하지 않아 내게 적합한 일이었다.
그러나 냉전체제 붕괴로 알라메다 해군기지가 문을 닫게 되면서 2000년 샌디에고 기지로 직장을 옮겼다. 오클랜드에 거주하는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샌디에고에서 내 외로움을 달래준 것도 한국일보였다. 한국일보가 내 말벗이자 세상소식을 전해주는 친구였다. 아침마다 아무도 열어보지 않는 신문을 펼칠 때 그 산뜻한 기분이란… 지금도 누리는 소소한 행복이다.
이윤호씨 부부가 2017년 8월 뮤어우즈 국립기념관에서 두아들과 며느리, 손주와 함께한 모습
2005년 알래스카 항공으로 이직해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왔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생활만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80년 나는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 둘째형, 또다른 여동생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둘째형은 그렇게 원하던 수술도 받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여동생도 당뇨로 내곁을 떠나갔다.
애리조나주립대 의대 교수이자 암 전문의(Oncologist)인 큰아들과 주 공무원인 작은아들, 40여년간 인생의 고비고비를 함께 해준 아내가 있어 나는 버틸 수 있었다.
올해로 72세, 리치몬드에 거주하고 있는 나는 요즘 서울역에서 리어카를 끌던 아버지, 짐가방 3개로 김포공항을 떠나올 때 막막했던 심정, 우리 아이들을 살뜰히 살펴주던 장모님, 리쿼스토어에서 일하다가 강도 만났던 기억, 척추염으로 고통스러워했던 둘째형 등 옛일을 자주 떠올린다. 그래도 직업에 귀천이 없는 미국에 오길 잘했다, 어려움 속에도 내 가정을 책임진 것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영어 스트레스, 지금도 단어를 찾아가며 영문신문을 본다. 남의 도움 없이 영어서류를 읽으려면, 멀리 사는 자식들에게 걱정끼치지 않으려면 이런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오전 5시 30분 집으로 배달되는 한국일보를 펴본다. 하루종일 신문을 끼고 살면서 운동할 때 보고, 사람 기다릴 때 본다. 지금도 아침마다 한국일보를 처음 펼칠 때 설렌다. 한국뉴스, 미국뉴스가 가득한 한국일보를 보면 세상이 읽힌다. 미래가 읽힌다. 누굴 만나도 이야기거리를 쏟아낼 수 있는 것도 한국일보에서 얻은 지식과 정보 덕분이다.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한국일보는 나의 영원한 친구이다. ‘한국일보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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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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