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4일, 패러것 노스(Farragut North) 전철역에 내리니 초봄의 햇빛이 눈부셨다. 은퇴한 지 실로 14년 만에 다시 보는 그리운 D.C의 K 스트릿! 백악관은 내가 34년을 근무했던 ACEC에서 3블락 거리에 있다. 점심시간이면 매일같이 그 주변을 발이 닳도록 걷기운동을 하던 곳이다. 그랬던 그 거리가 그날은 인산인해로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발 디딜 틈 없는 군중 사이를 뚫고 백악관 정문 앞까지 진입하는데 40분 이상이 걸렸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주위를 살펴보니 그곳은 피켓을 든 학생, 학부모, 선생 그리고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도 한 때 전직 교사였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니 “All right! Let’s work together.” 하면서 모두들 오랜 친구처럼 반기며 빅 허그로 나를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어디서 기운이 솟아나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도 그들과 함께 웃고 울며 ‘Never Again! No More!’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비통한 울부짖음,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친구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치는 한 남학생의 절규, 한 순간에 스승을 잃은 어린 학생의 통곡, 사랑하는 제자를 떠나보낸 선생의 흐느끼는 눈물의 호소 등,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그들의 슬픔과 고통은 바로 나의 아픔이 되어 내 가슴을 적셨다. 내 부모, 내 형제, 내 아들딸의 죽음이 아니라고 무심할 수 없었기에 한달음에 달려 나온 80만명의 군중들!
12시 정오에 시작된 행사는 오후 4시가 넘어도 많은 시위대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백악관을 향해, 남은 군중들을 향해, 거리를 오가는 워싱토니안들을 향해 피켓을 높이 들고 마지막 순간까지 “Not Any More!” 를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집회가 시작할 때부터 그 군중 한 가운데 침묵의 한 시위자가 있었으니 그녀의 목에는 이런 문구의 피켓이 걸려 있었다. “남은 내 아이들은 누가 지켜 줄 것인가?” 목제 의자 위에 우뚝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무언의 항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성난 군중들이 아무리 피를 토하듯 구호를 외쳐대도 그녀에게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듯 시종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그저 그렇게 서 있었다. 장장 4시간을 마치 장승처럼, 마네킹 처럼! 누가 이 어머니를 저렇게 만들었는가?
피터 마크스(Peter Marks)는 4월 1 일자 워싱턴 포스트 스타일 섹션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 된다. “The rest is silence… 남은 말은 이루 다 못 하겠네!…” 이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작품 중 가장 비극적인 ‘햄릿’ 5막 2장에서 치명상을 입은 햄릿 왕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목숨도 내어줄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충신인 호레이시오우에게 남긴 말이다. 그는 또 그날의 대표적 스피커인 삭발의 엠마 곤잘레스가 연설을 멈추고 약 5분 동안 마이크 앞에서 침묵했을 때 “She was most powerful when she said nothing” 이라고 술회했다.
내가 본 그 어머니도 자식을 잃은 그 엄청난 충격을 이루 다 말로는 할 수 없어 모든 걸 가슴에 묻어버리고 그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자신만의 슬픔을 침묵으로 결사 항의하였음이리라.
그동안 의회는 총기난사사건이 터질 때마다 총기규제법 운운하면서 며칠 동안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다가 어느 사이 흐지부지 자취를 감추고 말아 매 번 국민을 얼마나 실망시켜 왔는가? 그래서 이번 시위는 터지고야 말았다. 참는 게 한계에 이른 것이다. 더는 기성세대나 정치인들을 믿을 수도 기대할 수도 없어 젊은이들은 ‘분노의 행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은 목적에 도달하는 그날까지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고한 이 나라의 시민, 더 더구나 미래에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 크게 공헌할 차세대의 젊은 인재들이 더 이상 희생되는 일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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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애 락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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