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한 번씩 그리워지는 꽃이 있다. 무심코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지나가는 꽃이다. 고향이라는 단어와 동격의 그리움으로 생각나는 그 꽃의 이름은 진달래이다.
건너다보이는 것이라고는 앞산이 전부였던 산골에서 나는 자랐다. 무채색의 풍경화와 같은 산골의 겨울은 춥고 적막하고 길었다. 고만고만한 능선을 거느리고 있던 앞산은 주름진 속내를 내보이며 무심하게 겨울을 견뎠다. 하루에 한 번씩 능선 너머로 넘어가는 해와 이따금 퍼붓는 눈발만이 그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존재들이었다. 봄이 오면 산은 가슴팍의 허술하고 느슨했던 자리마다 진달래를 피워냈다. 진달래는 꽃이기 전에 색채였다. 빛이었다. 그 꽃 빛은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인지한 색상이었다. 나는 그 색채에 이끌려 옷자락에서 진달래 냄새가 나도록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습자지처럼 얇은 꽃잎을 가지고 있는 진달래는 햇빛에 그 속살이 투명하게 비추이고 작은 바람에도 하늘거리는 꽃이었다. 보랏빛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모자라고 그렇다고 분홍색이라고 꼬집어 이름할 수도 없는 빛깔의 꽃이었다. 진달래는 잎사귀가 미지근한 초록의 움을 내놓기 전에 갈색의 메마른 가지 끝에서 피어났다. 산중에서 그 꽃을 마주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꽃을 꺾어 들면 하나의 등불이 가슴으로 따라 들어오는 것 같았다. 진달래는 송이마다의 개별적 아름다움보다는 무리 지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꽃이었다. 그래서 저만치 모여 있는 꽃 무더기에 이끌려 쫓아가 보면 좀 더 멀리 피어있는 꽃 무더기가 다시 손짓했다.
그 시절 한국의 산은 기름지지 않았다. 솔가리마저 땔감으로 긁어간 민둥산은 드문드문 키 작은 소나무나 참나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진달래는 돌무더기 근처나 비탈진 기슭의 반음지,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내놓았다. 아이들은 더 고운 꽃가지를 얻기 위해 자꾸만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산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등이 서늘해지는 걸 느낀다. 산중에 저녁이 찾아오고 있다는 표시였다. 아이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동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불안해진다. 그때 누군가가 깊은 산에 출몰한다는 문둥이 이야기를 꺼내기라도 한다면 아이들은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산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내달렸다.
할아버지가 볍씨를 불리는 항아리에 진달래를 담가 놓고 나머지는 마당 가 흙 속에 꽂아 놓았다. 놋대야 속 더운물에 손을 담그며 마당을 바라보면 도둑처럼 밀려온 어둠이 이미 진달래를 삼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갈색 가지가 먼저 어둠에 스며들고 드문드문 허공에 떠 있던 진달래 꽃잎이 차례로 어둠에 묻혀갔다. 대야 속 따뜻한 물에 손과 발을 담그면 산속에서 생긴 작은 생채기들이 따끔거려왔다.
그 밤, 잠자리에 누우면 먼 산에서 소쩍새 소리가 내려왔다. 고요를 가르며 소쩍, 소쩍, 쏘쩍쩍 울어댔다. 아주 슬픈 운율의 소리였다. 모든 게 모자라던 시절, 사람들은 그 소리를 솥적, 솥적, 솥적다 소리로 들으며 솥이 작아 굶어 죽은 며느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창호 문에 붙은 쪽유리를 통해 진달래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진달래는 어김없이 얇은 꽃잎을 반쯤 접고 있거나 꽃술을 가린 채 꽃잎을 몽땅 늘어뜨리고 있었다. 학교가 파하고 돌아와 보면 마당가 그 자리에 진달래는 없었다. 예로부터 진달래는 허망한 꽃이라서 집안에 들이는 게 아니라고 하시던 할아버지가 뽑아버린 것이다. 온산에 피어있는 게 진달래이니 아쉽지도 않았다. 나는 다시 진달래를 찾아 산으로 갔을 것이다.
진달래가 피어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빈 들판에 종달새 소리가 흩뿌려지고 작약에 뽀얀 움이 돋기 시작할 때쯤이면 아이들은 산속에 피어있던 진달래 같은 건 잊어버리고 다른 놀거리에 정신을 빼앗겼다.
할아버지는 왜 진달래를 허망한 꽃이라고 하셨을까. 나에게는 걸음마를 배울 때쯤 해서 죽은 막내 고모가 하나 있었다고 했다. 어린 것들의 죽음이 빈번하던 시절, 할아버지는 온기 잃은 작은 주검을 손수 거두어 앞산에 묻었다. 거기가 어디쯤인지 알고 싶어 하는 할머니에게도 평생을 함구하고 사셨다. 그때가 초봄이었다고 하니 진달래와 무관치 않으리라. 아마도 그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봉분을 만들 수 없었던 어린 무덤들은 산짐승들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돌무더기를 쌓아두는 게 전부였다. 할아버지 가슴에는 평생 내려놓을 수 없는 돌무덤 하나가 얹혀 있었으리라. 지게 지고 오르내리던 산길, 혼자만이 기억하는 그 돌무덤 위에 아무도 몰래 진달래 한가지쯤 꺾어 올려놓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도 꽃도 척박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출근길에 벚나무 아래를 스쳐 지난다. 봄비가 한번 지나가고 떨어진 흰 꽃잎들이 나무 밑에 도래방석을 깔아 놓은 듯하다. 강변도로로 접어들자 온통 초록의 나무들 틈에 언뜻언뜻 박태기나무(chiness redbud)가 꽃을 피워 놓은 게 보인다. 초록과 분홍, 오래전 진달래 피어있던 그 산의 빛깔이다.
다시 찾아온 사월, 지금쯤 그 산에도 풍문처럼 진달래가 번지고 있을 것이다. 앞산에 차례로 묻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무덤가에도, 애기고모 돌무덤 근처에도 등불처럼 진달래가 피고 있을 것이다. pinkmd4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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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미 수필가 /포토맥,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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