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엽 내가 노폭 주립대학에서 신문학을 강의하던 시절 하루는 그 부근에서는 가장 부수가 많았던 버지니안 파일럿지의 주필을 초청해서 특강을 부탁했다. 당시 60대로 보이던 그가 자신의 젊었던 때 기자생활을 회고하던 중 백인들의 폭도가 어떤 흑인 범죄혐의자를 나무에 매달아 놓고 거세와 기타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 시키던 것을 취재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90퍼센트 이상이 흑인들이었던 내 학생들의 일그러진 표정들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된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것은 4월 26일에 개관하는 ‘평화와 정의를 위한 전국적 기념관’(이하 기념관)에 대한 기사와 함께 워싱턴포스트의 관련 사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기념관’은 남북전쟁 당시 남쪽 정부의 탄생지인 동시에 1950년대 흑인들의 민권운동의 발생지이기도 한 앨라배마주 수도 몽고메리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정부의 수도가 버지니아의 리치몬드로 옮겨지기 전 최초의 수도였던 몽고메리는 또한 1955년 흑인들은 버스 뒷자리에만 앉을 수 있었던 시절, 일을 마치고 피곤에 지친 로사 파크 여사가 버스 앞자리에 앉고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에 체포됨으로써 촉발된 민권운동의 시발지이기도 하다.
보도에 의하면 ‘기념관’의 입안자 겸 관장은 브라이언 스티븐스라는 사람인데 거짓증거로 사형 언도를 받아 처형을 기다리던 죄수들 125명의 유죄 판결을 DNA 등의 새 증거로 번복시키는데 공헌을 한 변호사란다. 물론 박물관이나 기념관 전문가들의 조언과 협조가 있었겠지만 10여 년 전에는 맥아더 천재상을 받았던 스티븐스의 ‘기념관’ 구성과 진열품들에 상당한 독창성이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기념관’의 진열실을 벗어나면 800개가 넘는 철제 관들이 머리위로 높고 낮게 배치돼 있단다. 800개의 관 뚜껑에는 4,000명이 넘는 사형의 희생자들이 이름이 적혀 있는바 관 하나하나가 미국 각 주의 동네(군)들로 그 흉악한 잔인행위들이 저질러진 곳이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과 그의 암살 이후에 인준된 수정헌법 13조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가혹한 흑백 분리정책과 입법에 더해 범죄 혐의가 있는 흑인들만 아니라 때로는 건방지다고 느껴지는 흑인들을 공개적으로 사형시키는 등 흑인들을 계속 억압해왔다가 1960년대부터야 흑인들의 참정권 등이 보호되어온 게 역사적 사실이다. 아직도 “흑인 생명들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운동이 진행형인 것만 보아도 노예제도의 원죄 후유증이 이곳저곳에서 발생되는 현실이라서 그 ‘기념관’의 교육 효과에 대한 기대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기념관 밖에는 역시 800여 개 이상의 군 이름들이 적힌 관들이 줄지어 있어 문제의 군들이 자기 지역의 관을 찾아가 군 소재지 안에 안치하고 추념할 것을 권장한다는데 이미 30여 개 군에서 호응했단다.
노예제도 폐지 이후 1950년대까지의 흑인들에 대한 사형은 주로 남부에서 이뤄졌지만 다른 주들에서도 발생됐었다. 노예제도의 슬픈 유산인 셈이다. 스티븐스 관장은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백인 가족들이 법원 청사가 있는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흑인이 불태워 죽임을 당하거나 나무에 매달려 죽거나 또는 고문을 당해 죽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탄식한 것으로 보도됐다. 물론 사형을 당한 흑인들 중에는 실제로 백인을 죽였거나 백인 여자를 겁간한 범법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범법자들이라도 마땅히 공정한 재판을 거쳐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는 게 적법절차다.
‘기념관’ 안의 기록실에는 이런 사례들이 인용되어 있단다. “1888년 앨라바마주 스크리머에서는 흑인 몇 사람들이 백인의 우물물을 길어 먹었다고 사형당했다.
“루이지애나주 티보드에서는 1887년에 사탕수수밭 흑인 노동자들 수십 명이 저임금에 대한 항의로 파업을 한 것 때문에 사형 당했다” “켄터키주 히크만에서는 데이빗 워커와 그의 부인 그리고 네 자녀들이 워커 씨가 백인 여자에게 불손한 언사를 썼다고 해서 1908년에 사형 당했다.
워싱턴 DC에서 불과 80마일 떨어진 메릴랜드주 솔즈베리에서는 1931년 12월 4일 품삯 때문에 백인과 다투다가 그를 죽였다는 혐의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던 매튜 윌리엄스(23)가 흑인 전용 병실에 있는 것을 백인 폭도들이 습격해 얼음 꼬챙이로 찌르고 세 블록 거리를 질질 끌고가서 법원 청사 부근 나무에 매달아 죽이고는 시체를 트럭 뒤에 달고 흑인 밀집지대를 휘돌아 흑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도 모자라 윌리엄스의 손가락들을 잘라 흑인 집들의 포치에 던졌다. 그 월리엄스의 이름이 와이코미코군의 세 명 사형 희생자들 가운데 있는 바 그 중 한 사람은 가게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던 중 백인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고 그 얼굴마저 훼손되어 신원미상으로 남아있다는 보도다. 대다수의 백인 폭도들이 처벌되기는커녕 거리를 활보했었음을 언급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할 것이다.
인종차별, 인종증오가 얼마나 반인류적 범죄인가를 새삼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몽고메리의 ‘기념관’을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
<변호사 MD, VA 301-622-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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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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