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21
▶ ■박동선의 미 소환 전야

가운데가 박동선(원내)이 살던 DC의 3층짜리 타운하우스로 워싱턴 총영사관과 듀퐁 서클 사이에 있다.
-캐딜락에 자신의 이름 번호판 달고 다녀
Tongsun Park. 자신의 이름을 딴 ‘TSP’란 번호판을 달고 흑인 기사가 운전하는 캐딜락 뒷좌석에 몸을 싣고 다니던, 마흔을 갓 넘긴 한 한국 남자가 1970년대 중후반 거대한 미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박동선(朴東宣). 코리아 게이트 하면 동의어로 떠오르는 그는 처음부터 미 의회와 수사당국의 저주받은 ‘악의 꽃’은 아니었다. 특히 코리아 게이트에 메스를 들이댄 의회의 타깃은 김동조 주미대사와 중앙정보부(KCIA)였다. 정확히는 그들에 의해 자행된 한국 정부의 대미 로비였다.
그러나 미국은 여론의 나라다. 미 언론이 박동선에 포커스를 맞춰 연일 대서특필해대자 박의 비중은 갑자기 커져버렸다. 코리아게이트=박동선이란 등식은 그렇게 생겨났다.
-수수께끼 같은 동양인
한국의 대미 불법 로비와 관련해서 박동선에게 최초의 사단이 발생한 건 1973년 12월이었다. 미국 신문들이 훗날 보도한 바에 따르면 한국을 방문하고 알래스카를 경유해 미국으로 가던 박은 앵커리지 공항에서 세관 검사를 받았다. 미 의원들의 이름과 금액이 적혀 있는 이상한 서류를 손가방에서 발견한 세관원은 상관에게 보고하러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박은 그 서류를 찢어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 돌아온 세관원은 서류의 일부분만 압수할 수 있었다.
코리아 게이트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1976년 여름, 미국은 포드와 조지아의 지미 카터가 맞붙은 대통령 선거로 뜨거웠다. 전세는 포드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닉슨을 사면해준 것에 발목을 잡힌 것이다. 포드에게는 워터게이트 이미지가 오버랩 됐고 그는 결국 낙선했다.
이 무렵, 워싱턴포스트지에 박동선에 관한 기사가 나기 시작했다. “어떤 동양 신사가 캐딜락을 타고 의회에 나타나 의원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누구인가?”
WP는 사교면(Style Section)에서 이 낯선 동양 신사의 이야기를 화제로 삼았다. 그러나 다음에는 사교 면이 아니라 메트로 섹션으로 옮아갔다.
“그가 운영하는 조지타운 클럽에 미 의원들이 출입하는데 뭐 하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정체불명의 수수께끼 같은 동양인(Inscrutable Oriental)’. 제목에서부터 부정적 이미지가 다분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던 10월, 한국계 로비스트가 돈을 뿌려댄다는 기사가 WP 1면을 장식했다. 한국인 실업가 박동선과 한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 의원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얼마 전 워터게이트 사건을 목격했던 미 국민들은 의회마저 부패에 연루된데 대해 분노했다.
-박동선의 DC 집에 가다
내가 박동선을 개인적으로 처음 만난 것은 1960년대 말이었다. 조지 워싱턴대 대학원에 다니던 나는 워싱턴 D.C., 현재 주미 한국대사관 인근에 있던 그의 집을 동료 학생들과 방문했다. 큰 타운 하우스 스타일의 3층짜리 집은 에어컨도 없는 작은 방에서 지내던 가난한 고학생들에게는 궁전처럼 느껴졌다.
방문을 끝내고 집을 나선 우리는 DC 경찰들이 도로변에 접한 그의 집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빈객들의 편의를 위해 경찰까지 나선 걸 본 일행 중 누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야~ 경찰까지 동원했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의 교통정리는 사적인 일에도 사례만 하면 해주는 것이었다.
-“박동선을 데려와라”
해가 바뀌어 77년 8월 연방 대배심은 1년의 조사 끝에 박동선과 김한조 등 4명을 기소했다.
하원에서는 이재현과 김한조, 김상근, 박동선의 고용인 등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청문회들이 계속 열리다가 그간의 증언들을 종합해 하원 결의안 ‘868’을 통과시켰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조사에 협력해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김동조 대사와 KCIA 요원들, 그리고 박동선이 의회에서 증언해야 한다는 압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모두 미 당국의 손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김동조는 한국으로 귀임한지 오래고, 박동선은 영국을 거쳐 한국으로 피해 있었다.
미 언론은 박을 미국에 데려오라고 연일 때렸다. 법무부와 국무부는 협력해서 한국 정부와 협의에 들어갔다. 마침내 주한 미 대사관에서 박을 신문하겠다는 합의를 봤다.
하원 윤리위와 재워스키 특별검사는 그러나 이 합의안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그들의 진짜 타깃은 김동조 대사와 KCIA, 즉 한국 정부였다. 민간인인 박을 조사하면 한국 정부는 그걸로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으로 발뺌할 것이란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법무부와 국무부 측은 한국 정부 인사들이 증언하는 데 부정적 태도였다. 외교관의 경우 미국의 검찰권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동선이 코리아게이트의 주역으로 조명 받게 된 것이다.
-서울 미 대사관에서의 증언
1977년 1월, 연방 대배심을 지휘하던 법무부의 벤자민 시빌래티 형사담당 차관보가 검찰관들과 서울로 날아갔다. 그들은 미 대사관에서 박동선을 만났다. 박은 선서를 한 후 신문에 답했고 거짓말 탐지기도 동원됐다. 그에게는 면책권이 제공됐다. 미 의원들에게 돈을 준 사실과 내용을 증언한다는 조건으로 미 측이 제안한 것이다.
하원 윤리위는 박동선의 증언 내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다수는 박이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증언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 때 브루스 카푸토(Bruce Kaputo) 하원의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공화당 소속의 초선의원인 그는 윤리위에서 유일하게 한국을 방문한 의원이었다. “박동선이 예상과 달리 카나리아처럼 다 불고 있다.” 윤리위 조사팀 사이에는 낙관론이 팽배해졌다.
-기내 화장실에서 생긴 일
당초 예상과 달리 박동선이 다 불게 된 데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박이 영국으로 도망간 후 법무부에서는 그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집안에서 일기와 회계장부, 그리고 대미외교 방침 등 그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중요 서류들이 확보됐다. 그 서류들을 근거로 조사를 하며 압박하니 박이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박은 순순히 미 의원들에게 돈을 건넨 내용을 샅샅이 증언했다. 그는 일기와 장부는 자신이 직접 쓴 것이라고 시인했지만 공문서 형식으로 된 대미외교 서류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난 모른다. 왜 우리 집에 그 서류들이 있는지….”
마침내 박동선의 미국행이 합의됐다. 상원과 하원에서의 증언, 프레이저위원회 청문회 참석, 그리고 법무부와 FBI 조사 협조, 오토 패스맨과 리처드 해나 의원 재판에서 박이 증언하기로 결정됐다.
1978년 2월 말, 박동선은 미국행 여객기에 올랐다. 미국 신문들은 박이 경유지인 하와이에 도착하자 미 태평양사령부에서 신변보호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그러한 국빈급 대우는 그의 앞으로의 수사 협조가 미국의 문제해결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원 윤리위에서는 수석조사관인 로버트 B.가 하와이로 파견됐다. 박동선과 동행해 워싱턴으로 온 그는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난생처음 1등석을 타 봤다네. 재미난 건, 비행기가 덜레스 공항에 내리려 할 때 이코노미 석에서 한 사람이 박의 옷을 들고 오더라. 박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사람이었어. 두 사람은 화장실로 가더니 박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데. 그 기내 화장실 얼마나 좁은지 알지?”
그도, 나도 웃었다. 사교계의 인물이었던 박은 그만큼 ‘이미지 관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덜레스 공항에 도착하자 취재진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나 박동선은 국빈들이 그러는 것처럼 답도 않고 손만 흔들며 태연히 지나갔다.
-당뇨 심하다며 휴식실 요구
그는 2월28일부터 비공개로 하원 윤리위 조사에 임했다. 조사장소는 하원 군사위원회 회의장이었다. 혹시라도 박과 연루된 미 의원들 이름이 밖으로 새나갈까 싶어 보안이 철저한 그 방을 이용한 것이다. 군사위 회의장에는 도청방지 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박동선은 증언 전에 조건을 내걸었다. “증언은 하겠지만 내가 당뇨가 심해 오래 하지 못한다. 반드시 휴식시간을 달라.”
비공개 심리가 끝난 후 1978년 4월3일-4일, 하원 윤리위 공개청문회가 열렸다. 하원 레이번 빌딩 2141호에서다. 청문회장은 2층에 있었는데 1층에는 박의 휴식을 위한 별도의 방이 준비됐다. 게다가 박을 위한 전용 승강기도 준비해놓았다. 박동선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다시 의회로 이목이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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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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