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주의 마케팅으로 민심 점령, 보수화된 2030세대도 변화 꺼려
▶ 반 푸틴파, 투표 보이콧 운동, 해외선 “압승 위한 조작 우려”
러시아에서 언론학을 전공하는 스무 살 대학생 예카테리나 마매이는 정부의 통제를 피해 만들어진 독립 언론 사이트를 평소에 즐겨 본다. 그렇다고 마매이를 반 정부 성향으로 재단하면 큰 오산이다. 그녀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차르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는 말로 이번 대선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66)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
“썩은 독재라도, 혼돈에 대한 공포보다는 낫다”는 러시아 국민들의 강력한 재신임 여론에 힘 입어, 18일 치러지는 러시아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의 연임이 확실시 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개헌으로 황제 지위에 오른 데 이어, 푸틴 대통령은 이번 대선을 단순히 대통령직을 넘어서 러시아 국부(國父)로 도약하기 위한 대관식으로 삼겠다는 의지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1인 장기 집권이 푸틴 대통령에게나, 러시아 국민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며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러시아 입장에선 최후의 독배인 셈이다.
■ ‘차르’ 푸틴의 부재가 두려운 러시아
러시아의 푸틴 시대는 2000년부터 개막했다. 임기 4년의 대통령직을 두 차례 수행했고, 2008년부터는 4년간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 직함을 빌려준 뒤, 총리를 지냈다가 2012년부터 다시 6년 임기 권좌에 올랐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면 벌써 집권 4기로 기간만 해도 20년이다. 31년(1922~1953) 간 러시아를 호령했던 스탈린 전 공산당 서기장에 이어 두 번째로 길게 지배하는 21세기 차르가 되는 셈이다.
푸틴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무기는 ‘강한 러시아, 러시아 퍼스트’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다. 냉전 시대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웅을 겨뤘던 강대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데 러시아 국민들은 열광했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 드러난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80%를 웃돈다. 20, 30대 젊은 층은 ‘푸틴 세대’라고 불릴 만큼 기성세대보다 지지가 높다. 불가리아 진보전략센터 정치 전문가 이반 크라스테프는 최근 유럽 대외 관계협의회에서 “서구의 기대와 달리, 러시아의 25세 미만 젊은이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싫어하는 가장 보수적인 그룹에 속한다”고 진단했다.
푸틴 대통령 특유의 애국주의 마케팅은 러시아 국민들 마음을 파고들기에 충분했다. 선거를 일주일 앞둔 지난 11일 공개된 다큐멘터리 ‘푸틴’에서 그는 2014년 단행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합병과 관련해 반환 조치는 없다고 못 박았다. 불법 합병이라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제재가 가해지고 있지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마침 대선 당일은 크림반도 합병 4주년 기념일이기도 하다. 최근 국정 연설에서 미국의 미사일 방어막을 뚫을 수 있는 신형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무기 쇼케이스를 벌인 것 역시 미국을 겨냥해 러시아의 군사력을 과시하는 행보였다. 가디언은 “매우 유효한 대선 캠페인이었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포위당했다는 러시아 국민들의 전통적 피해의식을 푸틴이 영리하게 자극해 강력한 지도자상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적수 없는 대세론, 투표 보이콧에 흠집 우려
이번 대선에는 푸틴을 포함해 유명 앵커 출신의 30대 여성 크세니야 소브착 등 총 8명의 후보자가 뛰어들었지만, 대선 판 흥행몰이를 위한 들러리 역할에 그칠 것이라는 게 대체적 평가다.
푸틴이 경계하는 것은 경쟁자가 아닌 푸틴 자신이다. 압승을 거두지 못하면 대세론에 그만큼 흠집이 나고 정당성이 취약해져 향후 국정운영의 동력도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아이폰을 건 경품 이벤트까지 내걸고 투표율 독려에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 푸틴 정서가 커지는 것도 부담이다. 당장 야권의 유력한 대항마였던 인권 변호사 출신 알렉세이 나발니(41)가 문제다. 그는 횡령 문제로 후보직이 박탈 돼 대선 출마가 좌절된 상태로, “가짜 선거를 거부하자”며 러시아 전역에서 투표를 보이콧하는 이른바 유권자 파업 운동을 벌이고 있다. 나발니의 반 푸틴 시위는 당국의 감시를 피해, 소셜미디어(SNS)로 영역을 넓히고 크렘린과 멀리 떨어진 지방 도시들을 주로 공략해 전국적 형태를 갖췄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나발니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경우 푸틴 대통령이 운영하는 국영TV보다 구독자수가 더 많았다. 외신에선 푸틴이 목표로 하는 ’70(투표율)-70(득표율)’을 달성하기 위해 선거 조작도 불사할 것이란 나설 것이란 경고까지 내놓고 있다.
■영원한 제국은 없다 ‘푸틴 피로감’ 난제
전문가들은 푸틴 대통령 앞에 놓인 위기는 당장의 선거보다 6년 임기를 마친 2024년 이후에 닥쳐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푸틴 제국을 유지할 법적 기반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에게는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대통령직 수행이다. 러시아는 연임의 경우 2번으로 제한해놨기 때문에 이번에 임기를 마치면 반드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혹여 시진핑 주석처럼 헌법을 뜯어고쳐 종신 집권에 나설 수도 있지만 물리적 나이를 고려하면 쉽지 않다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제성훈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는 “푸틴은 ‘국부’로서 러시아 국정에 관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집중할 것이다”며 “후계자 물색도 포함되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이 실권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달릴 것이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 같은 구상이 현실화 될지는 미지수다. 당장 안팎의 여건이 쉽지 않다. 일단 미래 권력이 보장되지 않은 만큼 레임덕이 발생할 공산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 정치적으로 후계자를 세우는 과정에서 차세대 엘리트 그룹 내 권력 다툼과 혼란은 불가피하다. 수 년간 지속된 경제난 회복도 문제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속적인 원유 가격 하락과 서방 제재를 극복 해야 하지만, 러시아 내부 부패가 대외 투자를 끌어오는 데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무기였던 대외 개입주의에 대한 피로감도 커질 수 있다. 당장 크림반도 합병의 경우 2014년 압도적이었던 지지와 달리, 국내 예산 사용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중동의 시리아 내전, 유럽의 우크라이나 위기, 동북아의 북핵 문제, 미국과의 신 냉전 관계 등 사방에 지뢰밭이 널려 있는 형국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 수호자’로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대선 보다 대선 이후가 최대 관건이 될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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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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