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물의 권리’가 먼저냐, 아니면 ‘종교의 자유’가 우선이냐.
국내 최초 할랄인증 도축장 (파주=연합뉴스) 정빛나 기자 = 지난 12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연일가의 닭고기 도축장에서 직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공장은 국내 육류 도축장 중에서는 최초로 국제 할랄인증을 획득했다
네덜란드가 올부터 가축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의식을 잃게 한 후 도축하도록 의무화한 새로운 규제를 시행하자 현지 이슬람교와 유대교도들이 반발하고 있다. 당국은 종교계의 반발에도 불구, 동물보호 여론에 떠밀려 가축을 기절시킨 후 도축하도록 의무화했지만 비슷한 논쟁은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일고 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처리한 '할랄'고기를 판매하는 암스테르담 교외에 있는 정육점 '카둘'은 올해 1월 쇠고기 가격을 전달 대비, 5∼10% 인상했다. 정육점 주인인 알제리계 네덜란드인 라시드 카둘(39)은 가격을 올린 건 "새로 시행된 규제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슬람교에서는 가축을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도축하는 게 일반적이다. 네덜란드에서는 통증을 덜어준다는 생각에서 고압 전기봉 등으로 가축이 의식을 잃게 한 후 도축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지만 종교 교리에 따른 도축일 경우 예외를 인정해 왔다. 이슬람교와 유대교 신도들은 자신들의 도축법이 가축에게 고통을 안겨주지 않는다고 여긴다.
네덜란드가 새로 도입한 규제는 기존 처리방법을 인정하되 40초가 지나도 의식이 있을 때 기절시키는 걸 의무화했다. 새로운 규정에 따라 가축을 도축할 때 수의사를 입회시켜야 해 처리비가 늘어나게 됐다. 구매 가격이 오르는 바람에 카둘도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유럽에 반이슬람 정서가 확산한 시기를 이용한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네덜란드·이스라엘협회에 따르면 유대교에서는 '코셔(kosher)'라고 불리는 식품에 관한 유대교 규정에 따라 상처 입은 고기는 안 먹는다. 이에 따라 고압 전기봉 등으로 의식을 잃게 하는 건 기피대상이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유대계 정육점 마르크스에서는 고압 전기봉 등을 사용한 고기는 '코셔'가 아니라서 구매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사장인 루코 콜레(59)는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고기를 얻기 위해 유대 방식으로 더 많은 가축을 도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면서 "무엇을 위한 규제냐"고 반문했다.
규제도입 논의를 주도한 건 네덜란드 하원(의석 정수 150)에 5석을 보유한 소수정당 '동물당'이다. 마리안네 티메 당수는 "종교의 자유는 존중해야 하지만 제한 없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전에는 이슬람과 유대의 도축법이 통증을 안겨주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르지만, 시대에 맞춰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물당은 2008년부터 의식을 잃게 하는 조치를 하지 않는 도축의 전면금지를 요구해 왔다. 이슬람, 유대교 단체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지만, 최종적으로는 전통적인 처리법을 인정하면서도 "40초 경과 후"라는 절충안에 합의했다. 티메 당수는 "동물 애호 여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게 도움이 됐다"고 규제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이슬람과 유대 사회에서는 논의가 전면금지로 나아가지 않게 하려고 규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네덜란드 정부와의 협상에 나섰던 이슬람계 단체 '할랄콜렉트' 대표 알리 사라(59)는 "유대교계 단체와 협력해 겨우 전면금지는 피했다"면서 "규제에 불만이 있지만 중요한 건 규제를 확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압 전기봉 사용 여부를 알 수 있도록 표식을 붙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네덜란드·이스라엘협회장인 르벤 피스씨도 "유대계가 소수인 네덜란드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우리도 되도록 고통을 주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도축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이런 류의 규제 움직임은 유럽 다른 나라에도 확산하고 있다. 덴마크는 2014년부터, 스위스와 스웨덴도 의식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의 도축을 전면금지하고 있다. 전면금지가 법정투쟁으로 번진 사례도 나왔다.
벨기에 남부 왈론(Walloon)지역의회는 작년 5월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을 채택, 2019년 9월부터 도입하기로 했다.
유럽 유대인회의는 "서구의 중심에서 '유대인은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면서 "2차대전 당시 나치의 벨기에 점령 이해 유대교의 권리에 대한 최대의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유대 단체가 헌법위반이라며 작년 11월 벨기에 법원에 규제철폐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북부 플랑드르 지역도 내년부터 전면금지를 결정한 데 대해 이슬람계 단체가 비슷한 소송을 제기했다.
유럽연합(EU)은 가축을 도축할 때 사전에 기절시키는 걸 의무화하고 있지만, 종교적인 이유에 따른 도축의 경우 가축을 적절히 취급하는 걸 전제로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아사히는 벨기에 법원이 EU법원에 의견을 구하고 있어 EU법원이 어떤 의견을 내놓을지 주목된다고 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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