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
대한민국 2030세대가 ‘노멀크러시’ (Normal과 Crush의 합성어로 “평범한 삶에 반하다”라는 뜻)에 빠졌다. 사회적 지위가 대단히 높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눈에 띄게 풍족하지 않아도,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그저 평범한 아무나로서의 일상도 충분히 가치 있고 매력적이라는 인식이다.
이미 한차례 열풍을 몰고 온 ‘욜로’ (You Only Live Once: 한번 뿐인 인생, 미래보다 지금의 행복과 만족을 중시하자는 철학), ‘워라벨’ (Work and Life Balance: 일을 위해 삶의 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주의) 등과 함께 현 세대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해 말 20-30세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한 한 설문조사 (대학내일20대연구소, 2017 밀레니얼세대 행복 가치관 탐구 보고서) 에서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 몰입하기보다 현재의 일상과 여유에 더 집중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8%가 ‘그렇다’고 답했다. 또 다른 설문조사 (한국일보, 2017년 12월 온라인 설문조사) 에서도 ‘성공한 삶’을 큰돈을 벌지 못해도 충분한 여가를 갖고 교우 관계. 여행. 레저. 취미 등을 즐기는 삶(33%), 타인의 기준에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23.3%)이라고 정의한 2030세대의 비율이, 좋은 일자리. 재산증식 등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삶(15.7%), 사회에 공헌하고 존경받는 지위에 오르는 등 명예를 누리는 삶(12%) 보다 두배 이상 높게 나타나 성공과 행복에 대한 기존의 통념과 차이를 보였다.
기성사회가 정해놓은 성공한 삶의 기준에 맞추려 N포 세대(먹고 살기 위해 결혼, 출산, 인간관계 등 인생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세대)로 열심히 살아도 취업전쟁, 승진전쟁, 정년전쟁 등 끝없는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 ‘공사다망’ (공과 사가 다 망하다) 할 바에야 삶의 지향점을 미래가 아닌 현재의 나의 만족과 행복에 두겠다는 것이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관문만 통과하면 모든 것이 행복할 줄 알았지만 직장인 10명중 7명 (68.8%)이 출근만하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는 소위 회사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잡코리아, ‘회사 우울증’ 설문조사 2017). ‘기적을 이루고 기쁨을 잃은 나라’ 라는 꼬리표를 얻은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OECD 국가 중 아동의 삶 만족도·평균 수면시간·사회구성원 간의 상호 지지도 꼴찌, 국민행복지수 최하위권, 자살률·노인 빈곤율 1위라는 불명예 지표들이 뿌리내리고 있다.
돈이 성공이자 미래의 행복이라 배워왔지만 소득이 늘고 선진국민이 되었어도 행복은 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성장률과 자살률의 놀라운 비례는 돈·성공과 맞바꾼 행복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현실에 맞서 더욱 열심히 평범함의 가치를 찾으려 애쓰는 이들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젊은 사람이 꿈을 크게 가져야지. 요즘 애들은 정신상태가 글러먹었다”는 기성세대의 비난을 피할 수 없겠지만 지금 세대에서 삶과 노동의 의미와 가치는 기성세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를 희생하여 가족과 자녀의 미래, 나아가 국가 발전에까지 일조해야한다는 거대한 포부는 과거 고속성장시대의 주문일 뿐, 산업화시대에 맞는 헝그리 정신은 배운 적도 없을 뿐더러 ‘하면 된다’고 믿었는데 ‘해도 안됨’을 수없이 확인한 저성장시대의 현 세대에게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점점 더 의미 없는 일이 되어 가고 있다.
물론 모두가 평범함만을 추구하고 현실에 안주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꿈이 주는 동기부여와 경쟁을 통한 효율성 증가도 가치 폄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기만족의 범주에서 꿈을 실현하며 보통의 존재로서의 나 또한 인정하고 긍정하겠다는 노멀크러시적 인식은 과도한 경쟁과 성공강박증으로 피폐해진 지금의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
지친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은 어쩌면 “넌 할 수 있어!” 라는 부담스러운 격려가 아닌, “아무나면 어때. 대단한 꿈을 꾸지 않아도 돼. 작은 행복들이 모여 큰 행복이 될 수 있어.” 라는 소박한 위로일지도 모른다.
아무나면 어떤가. 아무리 평범해도 지금 누리지 않으면 기약할 수 없는, 작고 소소하더라도 오늘 나를 웃게 하는 확실한 행복들을 더욱 열심히 누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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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리 스탠포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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