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들고 계신 작은 손가방 속엔 늘 그렇듯 몇 번 접은 세계지도와 책이 보였다. 몇 년 전 홀로 되신 아버지는 구순 생신 잔칫상 받는 것을 민망히 여기셔서 가족들은 그 대신 여행을 계획했다. 마침 독일에서 일하고 있는 조카가 노르웨이 유람선 여행을 준비하여 아버지를 초청했다. 노르웨이 유람선은 독일의 항구 도시인 함부르크에서 떠난다 하여 아버지는 손자와 그곳에서 만나 함께 여행하기로 하셨다.
공항으로 모셔드리기 위해 아버지 집에 도착하니 언제 꽃을 심으셨는지 나팔꽃은 담장을 넘어 하늘을 향해 푸른 꽃을 피우고 봉선화는 집 앞뜰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웠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늘 책을 읽으시며 사철 변하는 자연경관에 경탄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익히 보아 왔지만, 이 많은 꽃을 손수 심으시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기에 놀라움이 컸다. 혼자서 꽃을 심으시는 모습을 상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세계지도 보는 것을 즐기시는 아버지로 인해 우리 집에는 항상 세계지도가 있었다. 한국에 살 때도 이사를 하면 아버지는 제일 먼저 세계지도를 대청마루 벽에 붙이셨고 가끔 가족에게 각 나라의 위치를 가리키며 그 나라의 역사와 풍속에 대하여 진지하게 때로는 재미있게 말씀해 주셨다.
아버지께서는 늘 떠나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달과 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소년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소년 시절 고향 문경에서 네 형제가 같이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셨고 다시 한국으로 그리고 퇴직 후 미국에까지 오신 아버지는 세상에 발을 딛고 계시면서도 마치 세상과 동떨어져 사시는 듯 보였다. 그런 아버지이기에 최근에 들려주신 일제 강점시대 아버지의 모습 - 일본군으로 징병 되어 폭탄 자살 훈련을 받던 중 인천 바다에 당도한 미국 군함에서 내린 탱크 밑으로 기어가 등에 진 폭탄으로 탱크를 폭파하는 출전 바로 전날 탈출했던 갓 스무 살 청년의 사투는 나를 놀라게 했다.
조카가 바쁜 그의 일정에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한 주 동안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이 기특하고 고맙다. 아마 그 애도 할아버지를 방문할 때 거실 한 면에 붙어있는 세계지도를 보며 자랐으니 미지를 동경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느꼈으리라. 할아버지와 함께 여행하면서 그가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면 좋겠다.
연세 많으신 아버지를 멀리 여행 보내며 가족들은 걱정을 했지만, 정작 아버지는 소풍을 앞둔 소년같이 설레는 모습이 역력했다. 하기야 책에서만 읽고 지도에서만 보던 함부르크와 노르웨이 삼면 바다로 여행을 가시게 되었으니 어찌 밤잠을 설치지 않으시랴. 그 모습을 상상하니 빙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아직 차를 운전하시며 모든 일을 손수 잘 처리하실 정도로 건강하심을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놓는다. 불과 얼마 전 아침 뉴스에서 96세의 미국 할머니가 수영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었는데 이번에는 한국방송에서 98세 된 고국의 할머니를 봤다. 복잡한 시장 한 모퉁이에서 60년간 떡볶이를 팔고 계신다며 시원한 웃음으로 인터뷰에 응하시는 할머니의 건강한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수하시는 분들을 보니 이름도 생소한 노인학(geront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접하던 학창시절이 생각난다. 노인 인구가 계속 느는 것을 예측하며 제일 먼저 노인학 학과를 세운 곳이 남가주 대학 (USC- Davis)이다. 그때만 해도 그게 언제나 실효성을 띄울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요즘 보면 그 시기가 바로 지금임을 알겠다. 칠십 나이에 생활 전선에서 활발하게 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년퇴직 후에도 지역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쉽게 본다.
백 세 시대가 코앞이다. 이것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과 그에 따른 의식 구조의 변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학자들이 연구 발표해 오고 있어 늘 주목하지만, 요즘 화두는 단연 ‘늙되 어떻게 늙을 것인가’이다. 의학과 생활환경이 발달하니 자연히 장수하게 되고 이미 예비 노년층인 된 나는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좋아하시는 책과 지도를 넣고 여행을 떠나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미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여행지에서 보시는 새로운 풍물과 자연에 감탄하며 지도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실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왕성한 호기심으로 이번 여행을 많이 즐기시고 더 젊어진 마음으로 건강하게 돌아오시길 빌어본다. 일주일 후에 만날 때 아버지의 첫 말씀은 무엇일지, 여행 여진으로 약간은 흥분이 섞인 아버지의 음성이 지금부터 기다려진다.
(이 글은 2014년에 쓴 것이다. 음력설에 우리 집에 오시겠다고 하신 아버지는 2018년 1월 25일 새벽에 94세로 평안에 깃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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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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