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당했데” “뭐가” “아무개한테 말이야. 이번엔 교인 돈 30만 달러 해먹었데” 어느 동창생들 간에 나눈 대화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무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돈 있는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의류 관련 사업 투자 명목으로 돈을 빌리고는 생활비와 유흥비로 탕진하기로 소문난 인물로 동창들 사이에서는 이미 경계 대상이 됐다고 한다. 파산도 두 번이나 했다면서.
‘아무개’ 지인들에 따르면 한국에서 이민 온지 얼마 안 된 교회 교인에게서 30만 달러를 투자 명목으로 받고서는 절반은 매달 투자 수익이라며 나눠주다가 나중에는 사업이 안 된다는 이유로 돈을 더 이상 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폰지 사기다.
‘아무개’는 오래전 부인과 법적으로는 이혼을 해 놓고 버젓이 부부 행세를 하고 있고 요즘은 법적으로 이혼한 부인까지 나서서 투자자(?)를 물색하는 모습도 포착돼 주변에서 요주의 인물로 올렸다는 것이다.
커피숍과 옷가게를 운영하다가 문을 닫은 또 다른 ‘아무개’는 이자를 주겠다며 친하게 지냈던 ‘동생’의 쌈짓돈 3만 달러를 빌려 아들 결혼식 비용으로 사용하고는 파산 해 버렸다. 박봉의 남편 월급에서 조금씩 모아 은퇴 자금으로 쓰려던 ‘동생’은 속병까지 얻어 자리에 누웠다고 한다. “동생 돈을 꼭 돌려준다”는 말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지만 ‘아무개’가 돈을 돌려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모 고교 동창회장을 지낸 ‘아무개’도 순수익 20%가 보장되는 투자 상품이라며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 은퇴한 선배로부터 30만 달러를 가져갔다가 감감 무소식이라고 한다. 동창회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으로 돌아간 선배가 변호사에게 의뢰했지만 투자 손실이어서 돈을 되찾을 방법은 없다.
5년여 전 타주에서 재산을 자녀들에게 넘겨주고 LA로 왔다는 한 부부의 안타까운 사연도 남의 이야기만을 아닌 것 같다. 은퇴 기사를 다루는 기자에게 이들은 아들과 딸에게 주고 온 재산을 되찾을 수 없겠느냐고 물어 왔다.
집과 건물 등 상당한 재산을 모은 이들 부부는 날씨 좋고 한인들 많은 LA로 이주하면서 현지의 재산을 결혼한 아들과 딸 이름으로 바꿔줬다고 한다. 저소득층 노인 아파트, 메디케이드(메디칼) 등 정부 혜택을 받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2년이 조금 지나고부터 아들과 딸은 약속했던 월 생활비를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 아들은 이미 건물을 팔아 사업 자금을 사용했다가 망했고 집을 가졌던 딸은 돈을 보낼 여력이 없다며 외면을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의 돈은 은퇴를 대비해 모아둔 것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민 역사가 길어지는 만큼 재정적으로 안정을 찾은 한인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한 한인 은행 지점장에 따르면 적게는 50만 달러에서 많게는 수천만 달러까지, 평균 150만 달러의 현금을 예치시키고 있는 은퇴 한인들의 수가 상당수에 달한다. 여기에 세금을 내지 않고 장롱 속 깊은 곳에 또는 방바닥 카펫에, 뒷마당 나무 밑에 숨겨 놓고 도둑을 맞을 까 전전긍긍하는 한인들의 숨겨진 돈까지 합친다면 한인들의 은퇴 자금은 수억 달러가 넘을 것이라는 게 이 지점장의 추산이다.
문제는 은퇴 자금의 관리다. 은행 이자라고 해 봐야 1% 안팎이어서 연 평균 3.22%로 꾸준히 올라가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매년 화폐 가치가 2%씩 줄어든다는 계산이고 숨겨 놓은 돈 역시 매년 3.22%씩 줄어들게 돼 있다. 100만 달러를 땅속에 묻어 놓고 있다면 매년 3만2,200달러를 써보지도 못하고 날리는 셈이다.
이들에게는 10% 또는 20%, 심지어는 60% 이자를 주겠다는 주변의 꼬드김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투자는 결코 없다.
얼마 전 월스트릿 저널은 은퇴를 앞두고 범하면 안 되는 4가지 실수 중 첫 번째로 “돈 절대 빌려주지 말라”를 꼽았다.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은퇴 자금을 빌려줬다가 날리는 사례가 많은 모양이다.
“빌려줄 땐 서서주고 받을 때 무릎 꿇고 받는다”는 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무릎이라고 꿇고 받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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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섭 부국장·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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