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오후 5시, 평소보다 30분 늦게 퇴근했는데 겨울이라 거리가 이미 어둡다. 낮에만 다녔던 워싱턴의 노스 웨스트 8번가의 밤이 딴 세상처럼 낯설다. 원래 타야 했던 고속열차(VRE)를 놓친 후라 서둘러 차이나타운에서 전철을 타고 유니온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열차 출발시간 5분전에 도착했으나 그날따라 예정된 열차를 운행하지 않으니 다음 차를 타라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드디어 세 번째 열차를 탔을 때는 차창 밖이 안보여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잠시 딴 생각을 했던가, 열차에서 내려서 보니 내가 내려야 할 버크센터역이 아니고 롤링로드역이다. 암담한 기분으로 다시 다음 열차를 기다렸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이상해서 열차 운행시간표를 확인 해보니 내가 탔던 기차가 그날의 마지막 열차였다. 역 주변을 돌아보니 주차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다. 막차가 떠난 후라 차 타러 오는 사람도,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도 없다.
대책 없이 서 있는데 텅 빈 주차장 한 켠에 트럭 한대가 있고 운전석에 불이 켜 있다.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것이 무섭더니 이젠 사람이 더 두렵다. 트럭이니 남자일 테고 그가 지금까지 나를 계속 지켜봤을 거라고 생각하니 겁이 더럭 난다. 이를 어찌할꼬?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트럭이 있는 곳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운전석 가까이 가서 보니 그 남자는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차창을 두드리니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낀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핸드폰 웹사이트로 영업용 택시회사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전화해서 손님이 택시를 기다린다고 말해줬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역사 앞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는 안 오고 트럭도 이미 떠나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에게 택시회사 전화 번호라도 물어봐 둘 걸 하고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황망히 서있는데 주차장 저 편에서 사람 같은 움직임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늦은 시간, 어둡고 외진 곳에 여자 혼자 올 리 없고 필시 남자일거라는 짐작에 나도 모르게 바로 옆의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 사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쿵쾅거렸다.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만 숨이 멎을 것 같다. 한 순간에 마음을 다잡고 나는 내 모습을 의연하게 드러내고 그가 오고 있는 쪽을 향해 먼저 인기척을 했다. 그 사람이 오던 걸음을 주춤하더니 나를 본다. 나는 태연히 이웃집 사람 대하듯 ‘하이!’ 하고 인사를 건네길래 택시가 안 와서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럼 자기가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서 자기 차를 가져와서 나를 데려다 줄까 하고 물었다. 그제서야 보니 내 바로 옆에 자전거가 한 대 매여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사람이고 자기 자전거를 타고 가려고 온 것이다. 나는 좀더 기다려서 택시를 타고 갈 테니 택시회사 전화번호를 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친절히 택시회사 전화번호와 내가 서있는 곳 주소를 일러 주고는 자전거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침내 택시가 왔다. 택시기사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데 내 차를 주차해 놓은 곳 주소를 내가 알 리 없다. 그냥 버크센터역 이라고 하면 택시기사는 다 알 줄 알았는데 그는 잘 모르지만 일단 찾아가보자고 했다. 다행히도 오래 헤매지 않고 내 차가 있는 주차장까지 왔다. 막차가 떠난 지 두 시간 정도나 지난 후인지라 깜깜한 지하 주차장에는 내차 한 대 밖에 없다. 나는 황급히 택시에서 내려 내 차를 얼른 탔다.
그런데 나를 데려다 준 택시가 헤드라이트로 나를 비추면서 그대로 있다. 갑자기 온몸이 오싹해져서 시동이 걸리자마자 도망치듯 차를 몰았다. 그러자 그 택시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뒤늦게야 그 택시기사는 내가 어두운 주차장을 무사히 떠날 때까지 불을 밝혀주었음을 깨달았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만약 그곳에 트럭을 탄 남자가 없었더라면, 자전거를 타러 온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택시 기사가 끝내 오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는가… 밤 늦은 시간, 낯선 곳, 낯선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변하여 고마움으로 바뀌는 순간, 긴장했던 마음과 얼었던 몸이 풀리면서 졸음이 쏟아진다. 졸면서도 생각한다. 그런데 남자는 왜 내 인생에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운 대상인가. 이제라도 생각이 바뀌면 남은 생은 행복할 수 있을까? 좋은 시절 다 지난 후에야 후회처럼 밀려드는 회한을 꿈속에서라도 다시 생각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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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양희 워싱턴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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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습니다 많은 홈레스들도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이 많고 그들에게 배울점도 있습니다 색안경을 벗어야만 성숙한 사람이 될수 있겠죠 ?
남자를 두려움에 대상으로 보는 선입견을 내려 놓으십시요 그걸 버려야 한단계 성장 할수 있는겁니다 사람은 겉을 보고 판단합니다 겉과 속은 다르죠 범죄자들을 보면 인상좋은 사람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