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의 거리. 잎새 진 가로수마다 성탄 꽃등불이 환히 피었다. 구세군의 자선 냄비 곁에서 울리는 맑은 종소리. 그 소리는 가난하고 힘든 자들에게 은혜베풀기를 권하는 기도일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통 큰 은혜를 끼친 적이 있었던가? 남의 인생에 획을 긋는 호의를 베푼 적이 있던가? 생각하면 나는 40여년 미국생활 중 많은 분들에게 받기만 하고 살아왔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세 분의 은인을 생각한다.
20대 중반, 나는 설렘과 불안으로 유학 길에 올랐다. 노스웨스트기는 필라델피아 공항에 밤 10시 도착 예정이었다. 생면부지인 40대 K 목사님이 마중 나오기로 되었었다. 그런데 비행기는 계속 연착했다. 새벽 2시에야 비로소 트랩을 내렸다.
공항은 텅 비었다. 그런데 대합실 끝에서 한 분이 걸어오셨다. K 목사님이셨다. 낯선 이를 위해 새벽까지 기다리신 것이었다. 나 같으면 기다렸을까? 그는 흑인 청소년 사역을 하셨다. 나는 타주 대학원으로 떠나기 전, 여름내 목사님을 도와드렸다. 학생 캠프에서 시중도 들고, 교인들 집 잔디도 깎고, 심방도 함께 했다.
목사님은 아무 조건없이 내 미국 정착을 혈육처럼 도와주셨다. 애태우던 영주권과 장학금 문제 등, 관청과 학교로 손수 뛰어다니시며 거의 해결해 주셨다. 나의 첫 멘토며 해결사셨다.
30대 초반, 공부를 마치고 난 첫 직장을 와이오밍 환경청에 잡았다. 낡은 차에 세간살이를 싣고 주 수도인 샤이엔에 도착했다. 은발의 훤칠한 백인 신사가 꽃다발을 들고 우리를 맞았다. 나를 뽑아준 새 보스 밥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금발의 부인, 엘비라가 반갑게 뛰어나왔다. “아파트를 구할 때까지 우리랑 함께 지내요.”.
저녁이면 밥은 작업복을 입고 내 낡은 자동차를 수선했다. 고장이 하도 잦아 이름도 지긋지긋했던 중고 머큐리. 그는 차가운 차고 바닥에 누워 부속을 갈고 조이며 꼼꼼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나 같으면 그랬을까?
세월 가면서 밥은 내게 훈련과 책임의 기회를 늘려주었다. 그가 주 환경 국장으로 승진하면서 경상도만 한 지역의 수질 관리 책임자로 나를 발령했다. 나 같으면 백인 일색이던 그곳에서 이민자청년을 요직에 앉혔을까?
그는 계속 정부나 에너지 회사 환경 책임자들과 친분을 쌓게 했다. 주요 공청회는 패널로 참석을 권했다. 비록 원형탈모증에 걸릴 만큼 고생했지만 환경보전을 천직으로 살아가게 해 준 큰 스승이셨다.
40대 초반, 캘리포니아로 직장을 옮긴 후, 내 속에 숨어있던 글쓰기의 갈망을 일깨워 준 이가 L형이었다. 그는 타고 난 직관력과 감성적인 수필로 이미 미주에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중견 작가였다.
우리는 동란 때 대학 교수셨던 아버지가 납북된 공통점을 지녔다. 둘 다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커온 성장기가 우리를 남다른 인연으로 묶어주었다. 그의 진솔한 글을 읽으며 메말랐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그는 내 글을 “현대 수필”에 추천해 주었고, 북가주 한국일보 칼럼을 통해 전공과 문학을 함께 펼쳐보도록 독려했다. 그러던 그가 5년 전, 60중반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떠나기 직전 까지 글을 쓰고 싶으니 랩탑을 갖다 달라고 했다. 내게 그런 열정과 글 사랑이 있었던가?
와이오밍의 내 첫 보스 밥도 돌아 가신지 10년이 넘었다. 은혜를 채 갚기도 전에 한 분 두분 떠나셨다. 다행히 그의 부인 엘비라는 안녕하시다. K목사님도 건강하셔서 올해 구순이시다.
내가 기껏 해드리는 것이 두 분께 매년 생신날과 성탄절에 안부 전화와 카드를 보내 드리는 정도다. 80세 생신 때 온 가족이 찾아 뵙고 축하연을 해 드린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K목사님은 “내 평생 수천 명을 도왔는데 지금까지 은혜를 잊지않는 사람은 몇 안돼요.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기는 세상에 내가 고맙지요.” 오히려 칭찬하신다.
평생 은인임을 감사하며 K목사님께 드린 성탄 카드에 답장을 주셨다. “누구나 평생 남의 은혜를 입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두 빚진 자들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진 사람은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풉니다. 부족한 나도 가장 작은 자로 오신 아기 예수를 대접하 듯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대접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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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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